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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Oct 05. 2020

밥을 사게 해서 미안해

<보내지 못한 편지>



H, 있잖아,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가상의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네가 군대에 있었을 때처럼 언제든 내 편지를 받을 수 는 친구, 따뜻하게 아니 그냥 한마디 말이라도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지금도 그런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너랑 상관없는 아주 사소한 얘기들이지.


이런 얘기를 왜 나한테 하지? 그런 물음이 든다면 나는 너에게 예의가 없는 걸 거야.


아니면 '가상의 인물' 배터리가 다 되었거나.




갑자기 너한테 미안했던 게 생각이 나네.


예전에 이태원 한강진인가, 어느 연예인이 하는 식당에 갔을 때 말이야.


그때 네가 계산을 하도록 만든 건 잘못된 거였어.


내가 가격을 보고 좀 당황했거든. 그땐 내가 돈이 좀 없었을 때라.


그래도 그날 참 후회가 돼.


처음에 메뉴판을 볼 때부터 어떻게 하면 제일 싼 메뉴를 티 안 나게 고를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렸던 것 같아.


왠지 내가 사야 할 것 같은데, 메뉴 하나에 2~3만 원 하는데, 게다가 음료도 시켜야 하는데.


결국 난 두 번째로 싼 메뉴를 골랐나? 그리고 아마 음료도 안 시키고 물만 마셨던 것 같아.


너는 왜 이 식당에 오자고 한 걸까.


네 덕에 오랜만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온 게 좋으면서도, 굳이 이곳에 오고 싶어 한 너한테 원망스러운 맘이 들었지.


그래서 테이블에 놓인 계산서를 쉽게 집어 들지 못했어.


"이건 내가 살게."


너에게서 비로소 이 말을 듣는 순간, 아차 싶더라.


평소 같았으면 계산서를 뺏아서 실랑이를 했을 텐데 그날은 그러지 못했어.


이미 내 모든 표정과 마음이 들켜버렸던 것 같았거든.


심지어 난 그제야 더치 페이를 하자고 했지 아마.


그날 책을 몇 권 사고 이미 돈을 좀 썼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서 내겐 밥값으로만 오륙 만원 되는 돈이 참 부담스러웠어.


음식 값의 반절이 되는 돈도 사실 내 예산을 훨씬 초과하는 금액이었지.


그래도 내가 샀어야 하는데. 넌 군대에서 월급을 받았다며 네가 밥을 산다고 우겼어.


더 이상 말리지 못한 내가, 말리지 않는 내가 스스로 당황스럽더라.


하지만 그날 넌, 너도 아마 당황했었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군대 휴가 나온 애한테... 나 정말 두고두고 후회했어. 


늦깎이 군생활에 심적으로 육체적으로도 네가 많이 힘든 걸 아는데.


밥을 사주진 못할 망정, 다른 친구들한테는 다 밥 얻어먹고 술 얻어먹었을 텐데 겨우 나 같은 백수 친구 만나서 이렇게 눈치 보면서 밥을 사게 만들다니.


맘씨 좋은 네가 원망스럽더라. 나를 원망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서.


미안한 마음에 뒤늦게 디저트 먹으러 가자고 한 거긴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지.


내 딴에는 네가 그날 쓴 금액만큼 메꿔주고 싶었던 거야.


근데 그걸 알고 그냥 커피만 시키는 너에게, 배부른데  케이크니 뭐니 굳이 안겨 주는  이미 구차한 마음만 덕지덕지 붙은 거였더라.


만회할 수 없었어.


나는 참 속이 좁은 아이였나 봐.






가끔 이럴 때가 종종 있었어.


백수 시절 누굴 만나는 건 참 부담스러웠지.


그럴 때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를 실감하게 돼.


성격상 빚지는 건 못하겠고, 그렇다고 매번 사기엔 내가 '돈이 없어'.


'돈'이라는 걸 떠올리는 때는 누군가에게 뭘 해주고 싶은데 아무것도 없을 때란다.


그래, 돈도 벌어야지. 돈을 벌어야만 하지.


아무튼... 그래서... 늦었지만 미안했어, 그때.


근데 너도 약간 나랑 비슷한 것 같더라.


돈이 있으면 후배고 친구고 선배고 어른한테도 밥을 대접할 스타일이야.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착하게 살아야겠지.


돈을 벌어야 할 동기부여도 되고 얼마나 좋니.


나도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B 언니랑 S랑 너랑 밥 사주고 싶어.


다들 나를 앞에 두고 계산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까 봐 미안해.


이미 조금씩 우리의 경제적 격차는 그렇게 되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만날 이유도 희미해져 가고 있지만.


그래도 어쩌다 한번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때라도 부담스럽지 않게 만나고 싶어.


내가 부끄럽지 않아야겠지.


밥을 사주지 못해 미안하거나, 밥을 얻어먹어서 부끄럽거나 한다면, 모든 건 다 내 탓일 거야.




어떻게 하면 밥을 사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공부를 하다 말고 너에게 편지를 쓰게 된 건 이런 물음 때문이었어.


그런데 또 요즘은 무언가를 잘 받을 수 있는 것도 참 힘든 것 같아.


그날 밥을 네가 샀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도 뭔가 이상한 것 같기도 해.


왜냐면, 돈으로라도 때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에게 듬직한 친구가 되어주지도 못했지.


그런데 그렇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때 밥조차 살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밥을 사주면 "고맙게 잘 먹었다", "다음에 더 맛있는 밥 살게" 이런 말이라도 애교 있게 하면 좋을 텐데.


오히려 얼굴이 굳어서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으니까.


나는 참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어렵다는 생각을 해.


밥을 사는 것도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밥을 잘 얻어먹을 수 있을까?


이건 아마 평생의 숙제가 될 것 같다.




H에게


이 편지를 연습장 뒷면에 끄적여 놓고선 차마 보낼 수가 없었어.


아마 너에게 평생 말하지 못하겠지.


다음에 밥을 사게 될 때 너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그때 잘 먹었다"라고 말하고 싶어.


너는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도.




다음에 보자. 네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직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테니까.


부끄럽게 물들어가는 단풍을 보니 네 생각이 난다.


잘 지내고, 건강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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