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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공감

주머니 속의 송곳, 63호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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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ONE

※사진 출처: JTBC <싱 어게인> 공식 홈페이지


요즘 JTBC에서 방영 중인 <싱 어게인>이란 프로그램을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월요일 밤만 되면 하던 일을 미뤄두고 TV 앞에 앉아 본방을 사수한다. 출연 가수들이 노래를 하면 열심히 듣고 심사 결과가 나오기 전 몇 개의 어게인을 받을 것인지 맞히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게인 개수에 따라 TOP10 진출 여부를 결정하던 최근 몇 주간은 방송에 더 열렬히 관심을 기울였다. 대결 구도에서는 몇 대 몇으로 어게인을 받을지 제법 높은 적중률로 맞혀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렇다고 내가 귀명창이라거나 음악에 애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부르는 건 음치이고, 듣는 건 그냥 예전부터 들어온 아는 곡만 반복해서 듣는, 음악에 관해서는 아는 것도 관심도 없는 그저 문외한이다. TV에서도 드라마와 뉴스만 주로 볼뿐 이런 종류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포함해 예능은 잘 안 본다. 그런데 <싱 어게인>이 본방 사수를 할 만큼 새삼 나의 흥미를 자극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서 생각을 좀 해봤다.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63호 가수였다. 심심해서 리모컨을 여기저기 누르다가 우연히 ‘여보세요~이~’하는 첫 소절을 듣고 바로 채널을 고정했다. 노래를 너무 맛깔나게 잘해서 머리칼이 쭈뼛 서고 팔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엔 그게 무슨 프로그램인지도 몰랐고, 요즘 가수들 얼굴도 잘 몰라서 검색을 해보고 나서야 그가 ‘63호’로 불리는 무명 가수라는 사실을 알았다.


원래 나는 귀에 익숙한 원곡만 듣고, 아무리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라도 관객들의 박수나 환호 소리가 섞인 라이브 음반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데 63호 가수의 그날 그 노래가, 음악도 잘 모르면서 괜히 까다롭기만 해 아무 노래나 듣지 않는 나를 단박에 무릎 꿇게 하고 화면 너머 떼창에 합류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수십 번을 반복해서 들었지만 매번 흥에 겨워 어깨가 들썩인다.


그는 노래를 부르기 전 인터뷰에서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더랬다. 심사위원들은 ‘저 친구가 잘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고, 그는 ‘떨어지더라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무대를 하고 내려오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사람들의 응원과 자신의 굳은 결의 때문이었을까. 63호는 무대에 오르자마자 마치 작두 탄 무당처럼 홀린 듯이 노래를 불렀고 8개의 올 어게인을 받았다. 그를 보며 ‘낭중지추’라는 말이 떠올랐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반드시 주머니를 뚫고 나오며 그 뾰족한 존재감을 드러내게 돼 있다. 63호 가수 이무진, 바로 그가 그랬다.


그렇다면 탈락한 다른 가수들은 어땠을까? 내 마음이 그랬던 것처럼 심사위원들도 꿈을 이루기 위해 무대에 선 다른 참가자들을 위해 아낌없는 응원과 격려를 보냈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르긴 몰라도 예심을 통과해서 TV에 나올 정도면 그들도 무대에 서기까지 고통스러운 연마의 시간을 가졌을 거라 짐작해본다. 그런데 몇몇 참가자는 전문가가 아닌 내가 보기에도 가수를 지망하기에는 20% 부족한 뭔가가 있었다. 어떤 참가자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가수가 되겠다는 꿈 하나로 지금까지 긴 세월을 힘들게 버텨왔다고 했는데 결국 탈락해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 참가자를 보며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에서 진로를 선택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구나 하는 걸 느꼈다.


잠시 진로에 대해 생각해봤다. 좋아하는 것을 ‘흥미’, 잘하는 것을 ‘적성’이라고 했을 때 진로 선택은 흥미와 적성 사이에서 적절히 이뤄져야 한다고 진로 전문가들은 말한다. 진로 탐색 시 흥미는 없지만 적성이 뛰어난 일에 대해서는 흥미를 키울 수 있도록 동기를 찾아주고, 흥미는 많지만 적성이 부족한 일은 취미로 즐길 수 있게 이끌어주라는 게 일반적인 조언이다. 잘하는 일은 조금만 노력해도 큰 성과를 낼 수 있으므로 흔히 말하는 사회적 성공을 거둘 확률도 높아지는 것이다.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삶도 훌륭하다. 사실 자신의 흥미와 적성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다시 <싱 어게인>으로 돌아가면, 경연 초반에 탈락한 일부 가수들을 보며 적성이 부족한데 좋아한다는 이유로 계속 매달리다가 자칫 사회적 성공도, 삶의 행복도 모두 놓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수, 배우, 운동선수 등 예체능 계열은 타고난 재능이 다른 분야보다 특히 더 많이 요구되는 분야가 아닌가. 오해가 있을까 봐 덧붙이면, 탈락자들은 소질이 부족하니 가수 하지 말라는 식의 단선적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낭중지추’와의 싸움에서 패했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은 것뿐이다. 다만, 그 정도의 노력과 패기라면 그 길이 아니어도 분명 더 잘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 판단하는 게 어렵고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부모님처럼 자신을 진정 아끼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보는 것도 좋겠다. 인생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성찰할 수 있는 힘도 필요할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그렇게 많지 않고, 결정적으로 잘 못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 학창 시절 달리기를 하면 꼴찌를 다투며 결승라인에 도착하던 아픈(?) 기억 때문에 올림픽 육상 경기도 즐겨 보지 않는다. 이런 내가 달리기 선수가 되길 꿈꿨다면 아마도 인생이 무척 고단해졌을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싱 어게인>을 보는 이유는 ‘낭중지추’들이 펼치는 노래의 향연에 매료됐고, 그들이 뿜어내는 꿈을 향한 열정의 기운을 빌어 고목처럼 메마른 내 꿈에도 온기를 전하고픈 바람 때문인 것 같다. 63호 가수가 부른 ‘어떤 이의 꿈’이 오늘도 내 꿈에게 말을 건다. 너는 어떤 꿈이냐고.


어떤 이는 꿈을 잊은 채로 살고, 다른 이는 꿈은 없는 거라 하네.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아무 꿈 없질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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