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샤모송] 알자스를 지나, 노을 속으로 달려간

by 김풍류

에귀셰임을 서둘러 떠났다.

두 시간만 가볍게 머물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오후 두 시.

겨울 유럽의 해는 여유를 봐주지 않는다. 가야 할 길은 4시간 남짓. 햇빛을 조금이라도 붙잡아두려면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국경을 넘기 전, 프랑스의 소도시 뮐루즈(Mulhouse)에서 잠시 멈췄다.
목적지는 까르푸. 이유는 아주 현실적이었다. 스위스의 살인적인 물가 때문이다. 현지 사람들도 생활의 대부분을 프랑스 마트에 기대고 산다는 말에, 우리는 조용히 공감했다.


마트 안의 식료품 가격표를 보며 한국과 자꾸만 비교하게 됐다. 고기, 채소, 간단한 반조리 식품까지. 가격표 하나하나에 기분 좋게 속이 풀렸다. 게다가 이곳은 알자스다. 와인을 고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알자스 리슬링 몇 병을 장바구니에 담으며 "마트 구경은 언제나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중얼거렸는데, 정말로 한 시간을 넘게 머물렀다. 이쯤이면 쇼핑이라기보다는 거의 '사재기'에 가까웠다.


다시 도로로 돌아와 30분쯤 지났을 때, 드디어 눈앞에 빨간 바탕의 흰 십자가가 등장했다. 스위스 국경이다. 살짝 긴장했지만, 국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를 통과시켰다. 여행자의 긴장이란, 늘 생각보다 거창하고 결말은 허무한 법이다.


스위스에 들어서니 해는 이미 하강을 시작했다. 오후 네 시의 유럽 하늘은 이미 노을로 짙게 물들고 있었다. 바젤을 지나 베른을 지날 무렵, 갑자기 시선이 왼쪽으로 고정됐다. 알프스 산맥 위로 석양이 내려앉아 있었다. "저거 융프라우 쪽이야"라는 여자친구의 한마디에, 처음 알프스를 보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운전을 하는 동안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여행에서 마주하는 아름다움은 종종 예고 없이 찾아오곤 한다.


두 시간을 더 달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았을 무렵, 작은 마을 '샤모송(Chamoson)'에 도착했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밭이 둘러싼 마을. 내가 이곳을 선택한 건 오직 스키 때문이었다. ‘V4 밸리’라는 근사한 스키장이 있다는 유튜브 영상 하나가, 이 작은 마을을 여행의 목적지로 만들었다. 물론 나중에 눈 때문에 스키를 타지 못하게 될 거라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숙소는 아늑했다. 여행자가 숙소에서 바라는 것은 사실 그리 거창하지 않다. 긴 운전 후 피로를 누그러뜨릴 만한 침대, 그리고 따뜻한 분위기 정도면 충분하다. 다행히 이 에어비앤비는 그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창밖에선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처음엔 작은 먼지처럼 날리던 눈발이 어느새 굵어져, 창틀과 나무 가지, 지붕 위를 하얗게 덮어갔다.
눈이 쌓이는 소리는 없었지만, 묘하게 고요한 울림이 방 안까지 전해졌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프랑스에서 사온 삼겹살 비슷한 고기와 라클렛 치즈, 고추장 볶음밥, 그리고 알자스 와인을 식탁 위에 차렸다.


한국을 떠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삼겹살 생각을 하는 나를 보며 웃음이 났지만,
하얀 눈으로 덮여가는 창밖을 마주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저녁은 없을 것 같았다.
스위스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눈 속에 고요히 묻히듯 천천히 저물었다.


월,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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