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할 땐 그저 관용구였다. 집도 절도 없다는 말은 상황을 과장할 때 쓰는 표현쯤으로 알았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야 그 말이 정확해졌다. 주소가 없고, 내 이름으로 된 공간이 없고, 잠을 자는 곳이 ‘사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곳’ 일 때, 집도 절도 없다는 말은 더 이상 비유가 아니었다.
지금 우리는 교회 선교관에 머문다. 문을 닫고 들어올 때마다 이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가도,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동시에 밀려온다. 짐을 완전히 풀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건, 몸은 쉬고 있는데 마음은 계속 서 있는 상태와 닮아 있다. 잠자리는 있는데 안착했다는 느낌은 없다.
집을 생각하면 곧바로 다른 단어들이 따라온다. 돈, 서류, 조건. 아직 한국의 시스템에 몸이 덜 적응한 상태에서 은행과 부동산이라는 말은 나를 순식간에 작아지게 만든다. ‘대출은 될까?’라는 질문은 사실 집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 사회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확인처럼 느껴진다. 가능하다는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배제되지 않았다는 신호를 받고 싶은 것에 가깝다.
아이들은 이 모든 질문의 속도를 모른다. 특히 막내는 매일 우간다 이야기를 꺼낸다.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거기서는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고 말한다. 한국의 속도를 아직 모르는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괜찮을 거라는 말도, 곧 익숙해질 거라는 말도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 가벼워 보인다. 그래서 설명하는 대신 듣는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리워할 권리를 지켜주는 쪽을 선택한다.
집이 없다는 건 단순히 공간의 문제가 아니다. 몸을 놓아도 되는 자리, 질문을 내려놓아도 되는 지점이 아직 없다는 뜻에 가깝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머무는 곳에서 잠들고, 언젠가 살게 될 곳을 상상한다. 아직은 불안이 더 크지만, 이 시간을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도,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서도 아니라, 이 순간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남기고 싶어서 이렇게 기록한다. 지금의 이 흔들림마저 언젠가는 의미가 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