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할 수 있지만 증명할 수 없었다

by 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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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복지센터 창구 앞에서 남편은 한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고 했다. 가족이라서 계약이 어렵습니다, 라는 말이었다고. 전해 들은 나는 처음엔 그 말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가족이라서 더 쉬운 일 아닌가, 되묻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은 직원이 같은 설명을 한 번 더 반복해 주었다고 했다. 그제야 농담도 실수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우리의 계획은 단순했다. 당장 살 집이 없으니 엄마 건물에 있는 집 하나를 전세로 계약해서 들어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오래된 건물이긴 했지만 지붕이 있고 문이 잠기고 아이들이 누울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낯선 나라에서 돌아온 가족에게 그보다 현실적인 선택이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이 과정은 가장 빠르고 무난하게 끝날 줄 알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가족 간 계약은 인정이 어렵다는 말은, 예상 목록 어디에도 없던 문장이었다.


남편은 이유를 몇 번이나 물었고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했다. 가족 간 계약은 실제 거주 여부나 금액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도상 인정이 쉽지 않다는 설명이었다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우리는 실제로 살 건데, 실제로 돈도 오갈 건데, 실제인데 왜 실제가 아닌 취급을 받는 걸까. 그때 처음 알았다. 삶에서는 사실이면 충분했던 것들이, 제도 안에서는 증명이 되어야만 사실이 된다는 걸.


그래도 아직 방법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차상위계층 신청을 하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형편을 증명하면 최소한의 숨통은 트일 거라 믿었다. 그래서 남편이 필요한 서류를 챙겨 다시 창구 앞에 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소에서 멈췄다고 했다. 우리는 분리세대였지만 주소가 같았다. 우간다에 살 때 고지서나 알림, 혹은 언젠가 받을지도 모를 택배를 위해 한국 주소 하나는 필요했고, 그래서 엄마 주소로 등록해 두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함께 산 적은 없었지만 서류 속 우리는 한집이었다.


같은 주소면 지원이 어렵습니다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우리는 분명 따로 살았는데 서류 속 우리는 함께 살고 있었고, 함께 산 적이 없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제출할 칸이 없었다. 설명하면 될 줄 알았는데 설명은 항목이 아니었다. 사정은 있었지만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그날 남편이 돌아와 이야기해 주는 동안 나는 서류를 직접 본 사람처럼 장면이 그려졌다. 이름, 번호, 주소, 관계. 종이는 깔끔했고 칸은 정확했고 글씨는 또박또박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 어디에도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나 우리가 왜 여기 서 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겠지. 제도는 틀리지 않았고 직원도 틀리지 않았고 서류도 틀리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선 우리는 자꾸 어딘가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야 마음속에 한 문장이 또렷해졌다. 아, 이제 시작이구나. 돌아왔으니 정리되겠지 했던 시간은 끝났고, 돌아왔기 때문에 시작되는 시간 앞에 우리가 서 있다는 걸 알았다. 길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보이지 않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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