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던 밤에
“비를 상대하는 게 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다 쉬워요.”
이 말이 오래 남는다. 쏟아지는 비는 이유를 묻지 않고,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맞으면 되고, 젖으면 된다. 젖는 동안 누구의 표정도 살피지 않아도 되고, 마음을 정리해 꺼내 보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눈빛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말 한마디에 하루가 기울어진다. 사람 앞에 서면 자꾸만 나를 설명해야 할 것 같고, 괜찮은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 것만 같다.
공중전화 부스 안, 수화기 너머로 조심스러운 숨이 건너온다. “무슨 일 있어요?” 다정한 한마디가 오히려 숨을 곳을 앗아간다. 경록은 잠시 말을 고르지만 이미 목소리는 젖어 있다. 울음을 삼키려다 끝내 삼키지 못한 숨이 번지고, 그는 울면서 말한다. “아무 일도 없어요.” 그 말은 변명이 아니라 버팀에 가까웠다.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젖은 목소리가 그 사실을 먼저 드러내고 있었다.
그 장면 앞에서 오래 멈춰 섰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렇게 말하는지 생각했다. 아무 일도 없다고, 괜찮다고, 다 지나갈 거라고. 속에서는 조용히 무언가 무너지고 있는데도, 그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올까 봐 더 단단한 표정을 짓는다. 슬픔을 혼자 끌어안는 일이 습관이 되면, 누군가 다가오는 순간 오히려 한발 물러서게 된다. 울고 있으면서도 울지 않는 얼굴로.
미정은 그런 경록에게로 가겠다고 했다.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망설임 대신 발걸음을 택한 사람처럼. 사랑은 거창한 말이 아니라, 그 방향으로 걸어가는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묻고, “아무 일도 없어요”라는 대답 뒤의 울음을 알아차리는 일. 말보다 숨을, 표정보다 침묵을 읽어주는 일.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람 하나를 기다리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말없이 곁에 앉아주던 사람, 침묵을 캐묻지 않던 사람,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게 해 주던 사람. 비를 같이 맞아주던 사람. 그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내가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던 날들이, 사실은 가장 많은 일이 있던 날들이었다는 것을.
“걸어와도 괜찮은데.”
그 말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경록이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미정이 더는 망설이지 못한 사람처럼 그를 향해 뛰어왔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도착한 그녀를 보며, 그는 말했다. 걸어와도 괜찮다고. 또 다른 날에는 미정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경록이 그 거리를 가로질러 달려왔다. 그리고 같은 말이, 같은 숨결로 되돌아왔다. 걸어와도 괜찮다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달려온 사람에게 건네는 말. 그렇게까지 서두르지 않아도 이미 마음은 여기 닿아 있었다는 듯이. 네가 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던 시간이 아니라, 네가 오느라 힘들었을 시간을 먼저 헤아리는 말. 영화는 그렇게 보여준다. 사랑은 동시에 같은 속도로 달려가는 일이 아니라, 번갈아 기다려주는 일이라는 것을. 오늘은 내가 서 있고, 내일은 네가 서 있는 자리. 그 자리가 바뀌어도, 방향만은 같다는 것.
비를 맞는 것보다 사람이 더 두려워도, 결국 우리는 사람에게로 향한다.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누군가에게 가고 싶어서 마음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영화는 조용히 드러낸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한동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몇 번이나 아무 일도 없다고 말했을까. 그리고 몇 번이나, 사실은 누군가에게 뛰어가고 싶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기다리는 사람과 달려가는 사람을 번갈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누군가가 숨을 몰아쉬며 내 앞에 섰을 때, 나도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걸어와도 괜찮다고.
그래도 와줘서 고맙다고.
* 이 글은 영화의 몇몇 대사에서 시작된 사적인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