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최전선에서 일하는 내가 펜과 필름을 고집하는 이유
어릴 적 나는 전라북도 전주의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햇볕에 바짝 말라가는 빨래들, 장독대에서 장이 익어가는 냄새가 퍼지는 옥상의 풍경 속에서, 나는 펜으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검은 바탕 위에 선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작은 세계를 완성하는 과정은 어린 시절 내 하루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내 일상은 여전히 느린 리듬에 기대어 있었다.
동네를 산책하고 그림을 그리고 도서관에서 종일 책을 읽다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저녁을 함께 나누고.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이어가다 잠이 드는 나날들. 사소하지만 충만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삶은 결국, 평생 이 작은 동네에만 머물 것 같던 나조차 서울로 이끈다.
웹 브라우저라는 개념조차 몰라 인터넷을 ‘익스플로러’라는 이름과 동일시하던 내가, 먹고살기 위해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취업을 준비했다. 그렇게 시작한 길 위에서 어느덧 8년째 UX/UI 디자이너로 살아가고 있다.
빠름과 효율을 중시하는 세계. 기술과 최적화, 편리함를 요구하는 환경 속에서 나 역시 매일 속도를 맞추며 버틴다. 새로운 툴을 익히고, 필요하다면 직접 플러그인을 만들어 쓰며, 각종 인공지능 서비스까지 구독해 가며 뒤처지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터 밖에서 나는 정반대의 것을 선택한다.
펜으로 느리게 선을 쌓아 올리고, 필름을 직접 넣고 감아서 돌리며 카메라로 몇 장의 순간을 담는다.
검은 바탕 위에 하나씩 쌓아 올린 구불구불한 선들을 보고 있다 보면 나만의 호흡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름 한 롤을 아껴 담듯, 선 하나하나를 새겨 넣으며 나는 다시 나를 확인한다.
아마도 그 느린 과정이 내 안의 균형을 잡아주기 때문일 것이다.
기록은 결국 나를 닮는다.
그래서 나는 그림과 사진을 통해 일상의 작은 철학을 남기고 싶다.
이 작은 기록들이 나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잠시 머물 수 있는 쉼표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