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기록으로 다시 피어나다.

마음이 버틴 자리들 [1장]

by 이도화
“스무 해의 시간 끝에서, 다시 꺼내 놓은 나의 시간들.”

스무 해의 시간 끝에서 다시 쓰는 나


해외 생활이 어느덧 스무 해가 흘렀다.
이젠 혼자 있는 시간이 낯설지 않다.
조용함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한다.


오늘 집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추억 상자를 하나 발견했다.
세월의 향기를 품은 낡은 일기장 묶음이었다.
그 안에는 메모인지, 낙서인지 모를 흔적들이
시간의 결을 따라 빼곡히 남아 있었다.


잊고 지냈던 마음의 응어리들이
활자 속에서 조금씩 부서지고 흩어지는 걸 느꼈다.


나는 솔직했고, 급했고, 동시에 내성적이었다.
조금은 좁은 마음의 소유자였던 나는
그 모순된 성향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글을 썼다.
아픔도, 기쁨도, 희열도, 슬픔도
모두 활자에 흘려보내며 버텼다.


혼자 있는 시간을 나는 참 좋아한다.
손끝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즐거웠다.
그림, 요리, 머리 자르기, 붓글씨, 도예, 나무 공예, 종이접기…
손끝으로 세상을 다듬는 순간은 언제나 내게 위로였다.


하지만 어떤 일도 꾸준히 오래 하기는 쉽지 않았다.
금방 뜨거워지고 금방 식어버리는 성향 탓이었다.


그럼에도 단 하나, 오래 지속된 일이 있다.
바로 기록이었다.


내 인생의 모든 계절을 담은 수십 권의 일기장들.
형형색색의 다이어리 속에는
그때마다의 감정과 생각, 후회와 다짐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건 단순한 ‘보관’이 아니라
버리지 못한 나의 조각들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소유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소유할 수 없었던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작은 월셋집들, 최소한의 살림살이.
아이 둘을 데리고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해야 했던,
유랑민 같은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내 곁에 가장 오래 남아 준 것은
책과 노트, 그리고 기록이었다.
그것들은 나의 아집이자,
타향에서 외로움을 견디게 한
유일한 생존의 증거였다.


그래서 나는 요즘
그 기록들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드커버 노트를 스캔해 소프트 파일로 바꾸며,
언젠가 다시 떠날 때
가장 가볍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손에 쥐고 가기 위해서이다.


2025년 6월.
만 59세의 나는 결심했다.


이제는 내 인생의 후반전을 새롭게 써 내려가자.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나의 이야기를
조용히, 그러나 온전히 기록하자고.


인생은 결국 선택과 후회의 연속이다.
때론 자책도 하지만 그 또한 지나가야 할 일이다.
지나간 시간을 붙잡기보다 나는 그때의 오늘들을 기록하기로 했다.

나이는 숫자라지만
이제는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겠다.
늦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남은 날들을 정리하며
담을 건 담고, 버릴 건 버리며
가볍고 단단하게 살고 싶다.


오늘의 결심이 내 행동이 되고,
그 행동이 습관이 되어
내 인생 후반전이 새롭게 피어나길 바라고 있다.


내 나이, 만 59세.
이제 다시 시작한다.


기록으로,
나의 들국화 같은 삶을 피워내며.

✍️ 작가 노트

삶을 돌아보면, 가장 큰 변화는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작은 기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스무 해를 넘는 해외 생활 동안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하며 떠돌듯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 속에서도 제 곁에 남아 있던 것은
책과 노트, 그리고 기록이었습니다.
버리지 못한 조각처럼 남아 있던 일기들은
흩어지는 마음을 붙잡아 주고,
혼자서도 흔들리지 않게 해 준 작은 기둥이었습니다.


이제 만 59세가 된 저는
인생의 후반전을 다시 써 내려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는 사실을
기록을 통해 다시 배웁니다.


이 글은 그 결심의 첫 페이지입니다.
누군가의 삶에도 조용히 스며들어,
잠시 멈춰 자신의 이야기를 돌아보는
따뜻한 숨 한 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록은 지나간 나를 이해하게 하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