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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것

심장이 폭발하는 순간, 나는 달려간다

by 천비단




“헉, 헉, 헉.”


숨이 차올랐다. 심장이 터질듯이 뜀박질했다.


햇빛이 직선으로 붉은 트랙을 내려쬐고, 스파이크가 트랙을 밀쳐낼 때마다 가파른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도착선이 보였다.


나는 허벅지 근육을 더욱 쥐어 짜 마지막 스퍼트를 달렸다.


“오케이!”


연화가 크게 소리치며 초시계를 눌렀다. 도착선을 통과하고 나서도 내 몸은 열 걸음 정도 더 나아가다 멈췄다. 나는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두 손으로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에 땀이 한가득이었다. 나는 초시계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연화에게 물었다.


“몇 초야?”


“육십이 점 삼팔.”


“시발!”


나는 땅바닥에 대고 욕을 연거푸 쏟아냈다. 기대에 못 미치는 처량한 점수였다. 이런 식이면 절대 그 녀석을 이길 수 없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줄여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래? 연습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연화가 내게 다가와 물을 건넸다. 나는 물통을 받고 거칠게 뚜껑을 열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얼굴에 물을 쏟았다.


아쉬웠다. 항상 달릴 때마다 한끗 차이로 아쉬웠다. 조금만 더 잘하면 될 것 같은데. 60초의 벽을 넘을 수 없는 건가.


400m 단거리 달리기에서 60초를 끊느냐 못 끊느냐는 하늘과 땅 차이다. 62초도 이미 전국 최상위 성적이지만,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나는 반드시 60초 안에 들어와야 했다.


그 녀석을 확실히 이기기 위해서 말이다.


“빨리 옷 갈아 입고 와. 학원 가야지.”


“조금만 더 쉬고.”


햇볕이 인정사정없이 우레탄 트랙을 달구었다. 이제 4월에 들어섰는데 이렇게 뜨거워도 되나 싶을 정도다. 인조잔디가 깔린 운동장에는 그늘 하나 없다. 나는 트랙에 철퍼덕 주저 앉아 손으로 반팔티 목 부분을 잡아 펄럭였다. 엉덩이가 뜨끈하게 데워졌다.


싸구려 스포츠브라 끈이 어깨를 간지럽혔다. 아빠한테 좋은 것좀 사달라고 해도 아빠는 왜 운동하는데 비싼 브라가 필요하냐고 이해를 못 했다. 저렇게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혼자 날 키운 걸까.


저 멀리서 하교하는 남자애들이 나를 흘끗거리다가 지들끼리 히히덕대며 지나가고 있었다. 항상 연습할 때마다 나를 원숭이 구경하듯 쳐다보는 새끼들이다. 남자애란 다 멍청한 것들밖에 없는지. 나는 티셔츠를 펄럭이는 것을 멈추고 욕지거리를 입안에서 씹고 뱉었다.


스트레칭을 한 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땀에 젖은 체육복은 지퍼백에 구겨서 넣었다. 교복을 입고 나오자 연화가 문 앞에서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늦겠다. 빨리 가자.”


“땡큐.”


연화가 내게 가방을 건네주었다. 연화와 같이 학원에 걸어갔다. 연화는 항상 내가 방과후에 남아 연습할 때마다 나를 기다려주었다. 연화 같은 성격이면 나 말고도 친구가 많을 텐데, 왜 항상 나와 붙어다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끈으로 묶은 육상화를 한 손에 들고 터벅터벅 걸었다.


“…음료수 마실래?”


나는 가방에서 이온음료를 꺼내 연화에게 줬다. 연화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음료수를 깠다. 나도 한 캔 까서 같이 마셨다. 왜 줬냐고 묻는다면, 미안함의 표시였다. 기다릴 필요 없이 먼저 가도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미련스럽게 나를 기다려주고, 시간까지 재주는 연화에게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 내게 이런 감정이 들게 하는지, 하는 불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주는 친구인데.


“5월에 대회 있다고 했지?”


“…응.”


나는 힘없이 답했다.


전국 청소년 육상 대회. 청소년 육상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 나는 우리 학교 육상부 에이스로서 육상부 개설 이래 최초로 전국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이스’였’다.


솔직히 별 생각 없이 들어온 육상부였지만, 예상외로 재능도 있고 재미도 있어서 꾸준히 하고 있었다.


“걔 이길 수 있겠어?”


그 녀석이 전학오기 전까지는.


연화는 ‘걔’라고 부르고, 나는 ‘그 녀석’ 혹은 ‘그 년’이라고 부르는 아이.


이지연.


몇 주 전에 갑자기 전학와서는 육상부에 들어오더니 지금 내 에이스 자리를 위협하고 있는 아이다. 나는 이지연에게 좋게 말하자면 라이벌 의식, 나쁘게 말하면 시기를 느끼고 있다. 이지연은 정말 빨랐다. 원래 육상을 하던 애였는지, 처음 트랙에서 달릴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기록이 점점 빨라지더니, 저번 연습 때는 내 기록을 넘어섰다. 덕분에 전국 대회 출전자는 나 하나에서 나와 그 녀석 둘이 되었다.


졸지에 이지연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도 안다. 이게 정말 유치한 짓이라는 거. 근데 어쩌겠는가. 나도 어쩔 수 없는 중학생인 걸.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 애를 나보다 달리기를 잘한다는 이유로 질투하는 중이다. 단체로 연습할 때, 결승선을 먼저 도착하고 나서 나를 깔보는 눈을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른다. 마치 ‘이렇게 느린데 어떻게 에이스 행세를 하고 있었니?’라고 말하는 듯한 그 짜증나고 가소로운 눈빛. 분하고, 질투나고, 짜증 나고, 열등감 들고….


“걔 진짜 착하던데.”


“착하긴 개뿔.”


이지연과 같은 반인 연화의 말에 나는 고개를 반항적으로 휘저었다. 착한 척하는 가식적인 모습도 꼴보기 싫었다. 맨날 살랑살랑 웃고만 있고, 체육샘은 맨날 이지연이 달리기도 잘하고 말도 예쁘게 한다며 헤벌레 하던데. 말 예쁘게 하는 거랑 달리기 빠른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왜 나한테 너도 말 좀 착하게 하면 안 되냐고 뭐라 하는 건데!


그래서 나는 이번 대회에서 이지연을 이기기 위해 날마다 연습하는 중이다. 나는 다 마신 음료수캔을 찌그러뜨려 버스정류장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 캔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통 안에 빨려들어갔다.



날씨는 점점 더워져만 갔다.


중간고사 시즌이 다가와도 훈련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훈련하랴 공부하랴 정신이 없었다.


오늘 연습은 내가 이겼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나와 이지연의 기록은 영 점 몇 초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뛰는 내내 나와 거의 나란히 뛰는 그 녀석의 존재가 섬뜩했다.


연습이 끝나고 샤워실로 가는 중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찝찝했다. 나는 유니폼을 입은 상태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혜정아.”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나는 뒤돌아서 바라봤다.


이지연이었다. 그 녀석이 싱긋 웃고 있었다.


“…왜?”


나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얘가 왜 나한테 말을 거는 거지? 한번도 대화한 적 없는데.


“여기, 이거….”


이지연이 나한테 무언가 건넸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눈을 찡그리고 이지연한테 다가갔다. 그것을 알아본 순간 나는 깜짝 놀라서 그것을 낚아챘다.


“이걸 왜 네가 갖고 있어?”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지연이 놀라서 얼어붙었다.


“아, 아니, 탈의실에 떨어져 있길래. 네 거 같아서….”


그것은 내 지갑이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소중하게 간직해온 연분홍색 가죽지갑이었다.


“안에 봤어?”


나는 짙게 깐 목소리로 물었다.


“응. 사진 보고 네 거인 줄 알았어. 그 사진 혹시… 네 부모님이야?”


“알 거 없잖아. 왜 남의 물건을 함부로 만져?”


나는 싸늘하게 말했다. 이지연은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우물거리다가 내 반응을 보고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이지연은 사과했다. 우리는 어색하게 서 있었다. 나는 지갑을 품에 꼭 안고 이지연을 노려보다가, 뒤돌아서 걸어갔다. 몇 걸음 걸어가니 뒤에서 이지연이 말했다.


“혜정아, 우리 친하게 지내면 안 돼? 나 너랑 친구 하고 싶어.”


순간 내 걸음이 멈칫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다시 걸었다. 내가 멈춰선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샤워실에 오자마자 나는 옷을 다 벗고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줄기가 어깨에 떨어지더니 곧 후텁지근한 김이 샤워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하얀 타일이 촘촘히 박힌 벽에 이마를 기댔다. 심장이 쿵쿵대며 날뛰었다. 트랙을 죽어라 뛸 때와 다른 느낌이었다.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이지연이 그 사진을 본 것인가.


바닥에 물 튀기는 소리와 창밖에서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섞이며 배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중학교의 점심 시간은 작은 전쟁터다.


남자애들은 수업이 끝나기 5분 전부터 이미 몸의 절반은 책상 밖으로 나와 있다. 눈치 좋은 선생님은 일부러 일찍 수업을 마친다. 남자애들은 트랙에 준비 자세로 뛰쳐나갈 태세를 마친 육상선수처럼 기다린다. 긴장되는 순간,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남자애들이 튀어 나간다. 복도에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면 여자애들은 고개를 젓고 혀를 차며 그들의 한심한 행태를 바라본다. 나는 여유롭게 책상을 정리했다.


“혜정아! 밥 먹으러 가자. 오늘 돈까스 나온대.”


뒷문으로 연화가 빼꼼 나타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연화가 뽈뽈뽈 다가왔다. 1학년 때 나와 같은 반이었던 연화는 아직도 자기 반에서 친구를 사귀지 못했는지, 점심 시간마다 내게 찾아왔다. 뭐, 나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우리는 매일 같이 점심을 먹는다.


우리는 급식실 앞에 줄을 섰다.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입구 쪽에 남자애들이 왁왁거리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나와 연화는 줄 중간쯤에 나란히 마주섰다. 연화는 내 옆에서 최근 2주 간 급식 메뉴에 대해 심도 깊은 분석을 하며 재잘거렸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쳐주며 듣는둥마는둥 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지연이 서 있었다. 혼자 줄 뒤쪽에 끼어져 있었다. 불안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며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놀이공원 롤러코스터 줄에서 모두들 기대하고 있는데 혼자 벌칙 수행을 위해 억지로 타는 사람처럼 보였다. 연화가 내 시선을 좇더니 이지연을 발견했다.


“쟤를 왜 보고 있어?”


“쟤 밥 혼자 먹어?”


“음… 그러는 거 같던데.”


“쟤 친구 없어?”


나는 연화를 바라봤다. 연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없는 거 같아. 쉬는 시간에 누구랑 얘기하는 걸 본 적이 없어.”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놀랐다. 사근사근 착하게 말하고, 선생님한테 예의 바르고, 외모도 예쁘… 괜찮게 생겼는데 친구가 없다니. 전학 온 지 거의 1달 되지 않았나? 착하다는 평가와 별개로 사교성은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쩐지 계속 곁눈질로 혼자 있는 이지연을 훔쳐봤다.



“…너 그거 다 먹을 수 있어?”


“흥, 운동하려면 이 정도는 먹어줘야지.”


“운동선수는 원래 식단관리 같은 거 하지 않아?”


연화는 산처럼 수북이 쌓인 내 돈까스를 보고 의문을 품었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급식실은 적당히 소란스러웠다. 우리는 돈까스를 입에 넣으며 대화했다. 시험이 어떻게 나올까, 공부는 많이 했냐, 대회는 자신 있는지, 요즘 잘생긴 남자애가 너무 없어서 문제다 등등.


절반쯤 먹었을 때 멀리서 이지연이 보였다. 이지연은 식판을 들고 두리번거리다 구석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이지연이 앉은 자리 옆에는 이미 다른 애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이지연은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아무 존재감도 표출하지 않고 밥을 먹었다.


“…쟤는 매일 혼자 먹는 거야?”


내 말에 연화는 뒤를 돌아 이지연을 바라봤다.


“이렇게 보니깐 좀 불쌍하네.”


“…불쌍하긴 무슨.”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하며 돈까스 하나를 입에 넣었다. 이미 식을대로 식은 돈까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입 안에서 뭉개졌다.


연화가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신경쓰여?”


“신경 쓰이긴 개뿔!”


나도 모르게 테이블을 쾅 내려치고 꽥 소리질렀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금세 얼굴이 새빨개져 주눅이 들었다. 연화는 쿡쿡 웃었다.


“친해지고 싶으면 말 걸어봐.”


“뭐래. 내가 언제 친해지고 싶대? 난 쟤 싫어해. 알잖아.”


연화는 눈을 반쯤 치켜떠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당황해서 몸을 뒤로 뺐다.


“뭐, 왜?”


“아니… 너 평소에 쟤 욕 많이 하는데… 왠지 억지로 싫어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뭐라고? 아니야! 나 쟤 진짜 싫어해!”


나는 손바닥을 팔딱거리며 부정했지만 연화는 어른스러운 여유를 풍기며 말을 이었다.


“혜정아. 질투나 시기를 느낀다고 꼭 그 사람을 싫어할 필요는 없어. 라이벌이라고 너와 쟤가 적이 될 필요는 없다는 말이야.”


연화가 날 애 타이르듯 말했다. 연화는 가끔 보면 정신연령이 다른 애들보다 열 살은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쟤 진짜 착한 애야. 나도 몇 번 말 나눠본 게 다이긴 하지만. 한 번 친해져봐.”


“….”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반박을 해도, 화를 내도 아무 소용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째각째각 밥알을 씹었다.


“…쟤 왜 온 거야?”


“응? 뭐가?”


“쟤 전학 왔잖아. 왜 우리 학교로 전학 온 거야?”


“아… 너 모르는 구나.”


연화는 입으로 가져가려던 숟가락을 그대로 멈춘 채 표정이 굳었다.


“왜 그래?”


“아니, 이게, 좋은 얘기는 아니어서.”


연화는 보기 드물게 당황하는 듯했다. 갑자기 심각해진 분위기에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목소리를 낮췄다.


“좀 안 좋은 얘기야?”


“어… 좀이 아니라 많이….”


“말하기 곤란한 거면 말하지 마.”


연화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야. 말해줄게. 너도 알아두는 게 나을 것 같아.”


연화는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고개를 나한테 가져오고 오른손으로 입꼬리에 벽을 세웠다. 연화가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연이가 전학 온 날, 우리 반 샘이 아침에 지연이 오기 전에 우리한테 미리 지연이 사연을 말해줬거든. 좀 잘 챙겨주라고….”


“사연?”


나는 눈을 찌푸렸다.


“그게….” 연화가 숨을 살짝 들이켰다. “지연이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대.”


“뭐?”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친척 집에 맡겨져서 전학 왔대.”


“아니 잠깐,”


나는 머리 끝까지 화가 뻗쳤다.


“그 말을 왜 지가 멋대로 애들한테 말해? 그 샘 무슨 생각이야?”


“몰라. 자기 딴에는 전학생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더니 내 눈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어라, 지금 지연이를 위해 화내준 거야?”


“아, 아니, 뭔 개소리야! 아니거든?!”


나는 당황한 나머지 책상을 내려치며 소리 질렀고, 또 다시 주변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숙였고, 연화는 그런 나를 보며 깔깔대며 웃었다.


그 뒤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머리가 복잡해져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매끄럽게 이어지지가 않았다. 연화도 그런 나를 배려했는지 억지로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식판을 들고 일어나 식기 반납대로 걸어갔다. 구석에 조용히 숟가락질 하는 지연이가 보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지나가려 했으나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그동안 나는 지연이 뒷담도 많이 까고 욕도 많이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 전학 온 전학생을 사정도 모르고 그냥 내 에이스 자리를 위협한다는 이유만으로 욕을 하고 다닌 것이다. 얼굴이 새빨게졌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유치한 어린애 같이 굴었나.


하지만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은 1그램도 없다.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그게 내가 지연이와 친해져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게다가 나는 지연이를 싫어한다. 이 사실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침대에서 나는 잠에 들지 못하고 계속 뒤척였다. 지연이가 내 지갑 속 사진을 본 게 신경이 쓰여 짜증이 났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반으로 찢긴 흔적이 역력한 우리 부모님 사진을 보면서.






4월 중순이 되자 날씨가 초여름 수준으로 뜨거워졌다. 중간고사가 끝난 학교는 들뜬 분위기였다. 하지만 육상부는 1달 앞으로 다가온 대회 준비에 눈 뜰 새 없이 바빴다. 연습은 더 고되지고, 체육샘 잔소리는 늘어만 갔다.


그날도 연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학원은 며칠 안 가기로 했다. 나는 가방을 메고 시내를 걷고 있었다.


골목길을 지나치는 중이었다. 어두운 골목 안쪽에서 우리 학교 교복으로 보이는 애들이 몇 명 있었다. 남자애들 사이로 한 여자애가 서 있었다. 나는 별 생각없이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얼굴이 누군지 알아챈 순간 나는 뒷걸음질 쳐서 다시 골목을 들여다봤다.


“이지연?”


남자애들 3명이 지연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지연이는 겁먹은 강아지마냥 안절부절하며 입을 꾹 닫고 있고, 남자애들은 스마트폰을 지연이에게 들이대며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내 몸이 움직였다.


“야! 너희 뭐야.”


나는 골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소리쳤다. 남자애 셋이 동시에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 지연이의 눈빛이 내게 닿더니 동공이 확대되었다.


“넌 뭐야? 우리 학교야?”


“어, 쟤… 육상부 걔 아니야…?”


키 작은 남자애가 나를 긴가민가 하며 알아봤다. 나는 체육복 재킷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넣고 남자애들 앞에 섰다.


“니들 뭐하고 있냐고. 왜 얘 괴롭히고 있어?”


“괴롭히다니! 그냥 인스타 아이디 물어보는 건데.”


“너는 인스타 아이디 물어보려고 남자 셋이 여자애 하나 골목으로 끌고가서 얘기하냐?”


셋 중에서 그나마 덩치가 좋은 남자애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우리는 키가 거의 비슷해서 서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눈싸움했다.


“너 얘 친구냐? 뭘 그리 신경 써? 그냥 갈 길 가라?”


나는 코웃음쳤다.


“한 대 치겠다?”


“너 여자라고 봐줄 줄 아나 본데, 너 그렇게 나대다 큰일 나.”


나는 흘끗 지연이를 봤다. 지연이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고,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고 몸을 떨고 있었다. 지연이는 고개를 위약하게 저으며 내게 눈빛으로 말하는 듯했다. 자기 같은 건 내버려두고 도망가라고.


나는 다시 남자애 눈을 꼬나봤다. 남자애는 당장이라도 나를 칠 기세였다.


남자애들은 이게 문제다. 초등학생 때 여자애들한테 맞고만 살다가, 중학생이 되고 힘이 세져서 이젠 모든 여자애를 힘으로 압도할 수 있을 줄 안다. 그래서 운동부 여자애한테도 깝치는 거다.


나는 어깨에 매달려 있던 가방을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동시에 오른팔을 뻗어 녀석의 턱주가리에 꽂아 넣었다. 덩치는 볼품없는 비명을 외치며 나가떨어졌다.


지연이 옆에 있던 멀대 같은 놈이 깜짝 놀라며 내게 달려 들었다. 놈이 긴 팔을 허우적거렸다. 나는 몸을 옆으로 살짝 돌려 피한 뒤 그대로 놈의 다리를 걸었다. 놈은 나무에서 떨어진 긴팔원숭이처럼 버둥대며 넘어졌다. 나는 두 손을 깍지끼어 주먹을 만들고, 놈의 뒤통수에 내려찍었다. 놈은 꽥 소리를 내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 이 썅년아!”


멀리 날아갔던 덩치가 벌떡 일어나 소리지르면서 나한테 달려왔다. 분노에 눈이 멀어서 빈틈이 너무나도 많았다. 나는 녀석이 달려오는 속도에 맞춰 오른팔을 얼굴에 직격으로 꽂아주었다. 주먹과 팔을 타고 충격이 가해졌다. 오우, 꽤 아프겠는데.


“너… 너… 걔 맞지! 작년에 육상부 들어가자마자 3학년 남자 선배랑 맞짱 까서 병원 보냈다는 그 미친년!”


구석에 박혀 있던 안경이 부들부들 떨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나는 쓰러진 남자애들 머리에 침을 툭 뱉고 천천히 지연이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오자 안경은 기겁하며 쓰러진 남자애들을 데리고 도망쳤다.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허겁지겁 도망치는 꼴이 물에 빠진 고양이 같았다.


“혜정아….”


지연이가 울먹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가까이 다가가니 지연이는 심각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너 괜찮아? 쟤네가 뭔 짓 했어?”


“아니, 아무 짓도 안 했어.”


지연이는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입을 닫았다. 얼굴에 눈물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멍청히 서 있었다. 갑자기 지연이가 내게 안겼다.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더니 훌쩍훌쩍 울었다. 당황한 내 두 손이 허공을 휘적였다.



나는 공원 벤치에 팔을 걸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은 석양에 물들어 파스텔빛으로 칠해졌고, 그것을 배경으로 가느다란 구름이 가로선을 그으며 흘러갔다. 내 옆에 앉은 지연이는 오렌지 주스 캔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30분 가까이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기다렸다. 나는 친구를 위로하는 법을 모른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은 처음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친구를 위해 싸운 게 처음은 아니지만 친구랑 단둘이 공원에서 어색한 분위기로 있는 건 처음이다. 나는 괜히 주스를 홀짝였다.


“…고마워. 이제 괜찮아졌어.”


지연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또 다시 말이 사라졌다. 마치 누가 오랫동안 말을 안 하고 참을 수 있는지 대결하는 것처럼. 지연이는 주스캔을 내려다보며 패배를 자처했다.


“…걔네는 그냥 내 인스타 아이디 물어보기만 했어. 나쁜 짓 안 했어.”


“그렇다고 하기엔 너 엄청 무서워하던데.”


지연이는 고개를 더욱 숙였다.


“그건… 나 때문이야. 내가 남자를 무서워하거든.”


나는 고개를 돌려 지연이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남자를 무서워한다고?”


“응….”


지연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심한 듯 다시 눈을 떴다.


“나 예전 학교에서 학교폭력을 당했어.”


“학교폭력?”


“전남친… 남친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전남친이 억지로 나한테 고백해서 강제로 사귀게 되었었어. 근데 걔가 좀 나쁜 애였어. 애들 괴롭히고 그러는…. 계속 무섭게 사귀자고 해서 알았다고 했는데, 그 다음부터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괴롭혔어. 덕분에 난 친구들이랑도 멀어지고, 왕따가 되었지.”


지연이가 불안한 눈빛으로 내 눈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전학오게 된 거야. 그런데 아직도… 남자애들이 무서워. 한마디도 못 하겠어.”


지연이의 손에 쥐어진 주스캔이 얕은 비명을 지르며 찌그러졌다. 나는 지연이 같이 예쁜 애가 전학 온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친구를 못 사귄 이유를 짐작했다. 학교폭력의 영향으로 남자애들한테는 말도 못 하고, 교실에서 조용히 혼자 짜져 있었을 것이다. 예쁜 얼굴만 보고 접근하는 남자애들 때문에 더더욱 쪼그라들었겠지.


그런 아이가 내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다가온 이유는 뭐였을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던 걸까. 나한테 말을 걸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망설였을까.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내가 대체 왜 얘를 신경쓰는 거지? 왜 얘 하나 때문에 집에도 가지 못하고 공원에 앉아서 신세한탄이나 듣고 있어야 하는 거냐고. 나는 얘를 진짜 싫어하는데.


“…학교에도 저런 애들 있어? 싫다는데도 계속 연락처 물어보는 애들.”


지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방금 걔네들도 맨날 학교에서 인스타 아이디 알려달라고 조르는 애들이야.”


“저런 애들이 또 너 괴롭히면 나한테 말해. 나 몇 반인지 알지?”


지연이는 놀란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눈빛을 외면하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나 간다.”


지연이는 당황하며 인사했다. 나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머리가 복잡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는 쟤를 싫어하는데, 진짜 싫어하는데….


그러다 우뚝 멈춰섰다. 나는 뒤돌아서 외쳤다.


“야! 너 혼자 집 갈 수 있어?”


지연이는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으, 응!”


나는 그 대답을 듣고 다시 뒤를 돌았다. 하지만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내가 떠나고 그 남자애들이 다시 지연이를 찾아오면 어떡하지? 화가 바짝 올라서 지연이를 괴롭히지 않을까? 나는 집에 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한 채 갈팡지팡했다. 나 스스로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한 심정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아아! 시발!”


나는 뒤돌아서 지연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토끼눈을 뜨고 있는 지연이 손을 콱 붙잡았다.


“너 집 같이 가자! 데려다줄게!”


겨우 30센티미터 떨어진 가까운 거리인데도 나는 괜히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지연이는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다가 베시시 웃으면서 “응, 고마워.”하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지연이 집까지 걸어갔다. 아까 홧김에 잡았던 손을 어찌할 줄 모르겠어서 그냥 손을 잡고 갔다. 싫어하는 여자애 손을 잡고 집까지 데려다주는 기분이란, 참으로 묘하고 불쾌했다.


지연이는 고급스러운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이 지연이를 맡게 되었다던 친척 어른이 사는 곳이었다. 우리는 아파트 입구에서 헤어졌다. 지연이는 눈물 자국 난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길거리에 가로등 불빛이 따스하게 길을 비춰주었다.



또 다시 점심시간이었다. 여느 때처럼 침팬지 같은 남자애들은 앞줄을 선점하여 실컷 떠들고 있고, 나와 연화는 중간 줄에 서서 ‘왜 우리 학교는 닭고기만 나올까’라는 주제로 일방적인 토론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연화의 발언은 무시한 채 팔짱을 끼고 뒤쪽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이지연은 혼자 서 있었다.


줄이 거의 끝나는 끝자락에 혼자 멍청히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덩그러니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니 왠지 화가 났다. 연화는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말했다.


“또 지연이 보고 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질 것 같았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같이 밥 먹자고 하지?”


나는 홱 고개를 돌려 연화를 째려봤다. 연화는 씨익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어른이 반찬투정 부리는 아이를 귀엽게 여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계속 째려보니 연화는 눈을 피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하.”


연화는 나를 너무 잘 안다. 나를 어떻게 긁어야 하는지 제대로 파악했다. 그럼에도 그 말에 움직이는 내가 너무 싫다.


흥, 내가 못 할 줄 알고.


나는 줄에서 벗어나 지연이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고 앞에 섰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지연이는 내가 앞에 서자 고개를 들었다.


“야, 넌 전학 온 지 1달이나 됐는데 아직도 같이 밥 먹을 친구도 못 구했냐?”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고 삐딱하게 말했다. 뒤에서 연화가 조르르 다가왔다.


“안녕, 지연아. 나 연화야. 이연화. 우리 같은 반인데 나 알아? 우리 같이 밥 먹을래?”


내 말에 당황하던 지연이가 연화 말을 듣더니 화색하며 “응!”이라고 답했다. 응이 뭐냐, 응이. 저렇게 멍청하게 대답하는 꼴이 참나. 뭐가 좋다고.



밥을 먹으면서도 연화와 지연이는 재잘재잘 잘도 떠들었다. 둘이 결이 잘 맞아 보였다. 착한 애들끼리 통하는 무언가가 있나 보다. 나는 빈말이라도 착하다고는 절대 말 못 할 사람이라 둘의 대화에 끼지 못했다. 꺄르륵 웃는 둘이 들으라고 나는 일부러 밥을 험하게 퍼먹었다. 숟가락이 식판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혜정아, 너 무슨 밥을 그렇게 아저씨처럼 먹니?”


연화가 나를 놀리더니 또 꺄르르 웃어댔다. 나는 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연화와 지연이를 째려봤다.


“혹시 화났어…?”


지연이가 초조한 듯 물었다. 그러자 연화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쟤 그냥 관심받고 싶어서 저러는 거야.”


“관심은 무슨!”


나는 바로 반박했다. 급하게 말하느라 내 입에서 밥풀이 발사되었다. 공중을 비행하던 밥풀은 식탁에 떨어져 별자리를 만들었다. 연화가 쿡쿡대며 웃었다.


“지연아, 혜정이 츤데레인 거 알아?”


“츤데레?”


“쟤가 저렇게 틱틱대도 사실은 친구 엄청 좋아해. 작년에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 얘기해줄까?”


“야! 그거 말하지 마!”


나는 꽥 소리질렀지만 연화는 내 말을 가뿐히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작년에 남자애들이 나 놀려서 운 적 있거든. 나는 자리에 앉아서 울고 있고, 남자애들은 주변에서 나 놀리고 있고. 그런데 갑자기 혜정이가 소리지르면서 달려들더니 남자애들이랑 싸우더라고.”


“싸워…?”


지연이는 나를 흘끗 쳐다봤다. 어제 골목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남자애들이 5명은 됐는데, 혼자서 머리채 붙잡고 주먹으로 때리고 하면서 다 팼어. 그리고 교무실에 끌려갔지. 엄청 혼났어. 그 뒤로 내가 혜정이한테 반해서 친해졌지. 나 하나 구해주려고 남자애들이랑 싸워주는 친구. 엄청나잖아?”


“너 구해주려고 한 거 아니라고! 걔네가 시끄러워서 짜증나서 그랬던 거지.”


이 얘기 나올 때마다 사실을 정정해주는 데도 연화는 내가 자기를 구해주려고 싸운 줄 안다. 그냥 나는 화를 참을 수 없었던 것뿐인데.


“지연아, 혜정이 엄청 좋은 애야. 같은 육상부니깐 친해져 봐.”


연화는 싱긋 웃으면서 지연이에게 말했다. 지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뒤로도 둘은 재잘재잘 잘도 떠들었다. 그 소리를 듣는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둘 다 맘에 안 든다. 친구는 무슨 얼어죽을 친구.


처음 들어보는 지연이의 수줍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머리를 휘저으며 밥을 퍼먹었다.



점심을 같이 먹기 시작한 이후로 우리 셋은 늘 붙어다니게 되었다. 남들이 보면 친구라고 오해할 정도였다.


육상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와 지연이는 1달도 남지 않은 전국대회를 위해 수업도 모두 빠지고 특별훈련을 시작하기로 했다. 덕분에 우리 둘은 어쩔 수 없이 하루종일 붙어 있게 되었다.


전국청소년육상대회는 나와 지연이만 나간다. 나는 지난 도대회에서 2등을 했고, 지연이는 전 학교에서 예선 대회에 나가 입상을 했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전국대회 출전자가 1명 늘어난 체육샘은 우리 둘을 집중 케어 했다. 어쩐지 신나 보이기도 했다. 하긴, 이렇게 작은 중학교에서 전국대회에 둘이나 내보내게 되었으니. 체육교사 일생 중 다신 오지 않을 기회겠지.


나와 지연이는 첫 특별훈련을 받기 위해 트랙에 왔다. 나는 우리 학교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지연이는 학교 체육복을 입은 채 내 옆에 쭈뼛쭈뼛 섰다.


“너 왜 체육복 입고 왔어? 육상복 없어?”


“아직 안 받았어. 나중에 준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체육샘이 싱글벙글하며 다가왔다. 나는 체육샘을 보자마자 헛웃음을 터뜨렸다.


“샘, 그게 무슨 패션이에요?”


체육샘은 형광색 반팔티에 딱 달라붙는 반바지, 해병대 마크가 그려진 빨간색 모자, 그리고 아저씨들이 쓸 법한 촌스러운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다. 선생님은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고쳐썼다. 낮게 깐 목소리로 말했다.


“샘이라니. 훈련 중에는 ‘코치님’이라고 불러.”


지연이는 처음 보는 주책 맞은 선생님의 모습에 당황하여 아무 말 못하고, 나는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선생님이다.


체육샘이 고개를 홱 돌려 우리를 보더니 절도 있게 팔짱을 꼈다.


“제군들! 전국대회에 나가는 것은 처음이지. 본 코치도 그 긴장되는 마음 잘 안다. 왕년에 육상 대회에서 상을 휩쓸 때에도, 나도 똑같이 긴장하고 그랬지. 하지만! 본 코치와 함께 훈련하면 반드시 상을 탈 수 있다. 앞으로 한 달! 죽었다고 생각하고 나를 따라라. 알겠나!”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겨우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 사람도 우리 둘밖에 없는데 너무 과도하게 힘을 줬다. 수업을 듣고 있던 아이들이 창문을 내다보며 우리를 힐끗 쳐다봤다.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샘, 우리 학교에서 전국대회 나가는 거 처음이라고 너무 신난 거 아니에요?”


“어허! ‘코치님’이라니까!”


“에휴….”



400m 단거리 달리기는 육상 종목 중에서도 지옥이라고 불리는 종목이다.


그 이유는 단거리의 폭발력과 장거리의 지구력을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달리기를 할 때 산소가 고갈되면 근육에 있는 당을 분해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이때 젖산과 수소 이온이 생성되고, 이 때문에 근육이 산성화된다. 산성화된 근육은 뇌에서 오는 전기신호를 차단한다. 뇌에서 달리라고 명령해도 딱딱해진 근육은 움직이지 않고 저절로 멈추는 것이다. 육상 선수는 근육이 산성화된 상태에서도 계속 달려야만 한다. 이것은 마치 허벅지에 철근을 매달고 억지로 뛰는 것과 같다.


“너희는 200m 구간까지는 27초대가 나와.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걸 감안하면 엄청난 성적이지. 하지만 마지막 구간에서 퍼져. 고혜정, 저번 도대회 때 너도 느꼈지? 300m 까지는 네가 1등이었는데, 마지막에 역전당했잖아.”


체육샘…이 아니라 코치님이 알려준 훈련법은 다음과 같았다. 300m를 전력질주하고 1분 동안 쉰다. 그리고 남은 100m를 다시 전력질주한다. 1분 동안 쉬는 이유는 근육을 제대로 산성화시키기 위함이다. 젖산과 수소 이온에게 점령당해 근육이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굳은 상태에서 이를 악물고 뛴다. 이른바 ‘젖산 내성 훈련’이다.


“우웨에엑!”


트랙 끝에 다다르자마자 나와 지연이는 바닥에 엎드려 헛구역질했다. 붉은 트랙에 그어진 선이 흐물흐물 휘어지고, 시야 가장자리에 검은 안개가 끼고,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데도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엎어지지 마! 기절하기 싫으면 일어나서 걸어!”


코치님은 우리에게 다가와 겨드랑이를 붙잡고 일으키더니 양팔을 하늘을 향해 들게 했다. 나와 지연이는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걸었다. 혈관에 뜨거운 쇳물이 흐르고, 신경이 단선되어 스파크가 튀겼다. 허벅지에 몰렸던 피가 다시 뇌로 폭포처럼 쏟아지자 세상이 빙그르르 회전했다. 조금만 의식을 놓아도 바로 기절할 것 같았다.


“됐어. 이제 앉아서 다리 털어.”


그 말과 동시에 우리는 바닥에 쓰러져 다리를 털었다. 코치님이 다가와 종아리를 주물러줬다.


“10분 뒤에 다음 세트 시작한다. 시작하기 직전에 몸 풀어.”


이 짓거리를 총 3세트 했다. 코치님은 사짜 같은 겉모습에 비해 특별훈련은 자비가 없었다. 훈련이 끝나자 나와 지연이는 폐를 찢으며 호흡을 내뱉었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육체가 한계에 내몰리는 경험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팔 들고 걷기가 끝나자 코치님은 쿨다운 조깅을 하라고 했다. 젖산으로 빵빵해진 허벅지 근육을 조깅을 통해 녹이는 것이다. 육상 선수는 쉴 때도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부상을 입는다.


이쯤 되니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몇 분 달리고 나니 호흡이 안정되고 허벅지가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와 지연이는 숨소리로 대화하며 나란히 트랙을 뛰었다.


“이제 마지막이야. 햄스트링 스트레칭 하자.”


코치님은 잔디 위에 매트를 깔았다. 내가 그 위에 하늘을 보고 누웠다. 어느새 노을빛에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코치님이 스트레칭 하는 방법을 지도해주었다. 내가 오른다리를 들어올리고, 지연이가 내 종아리를 잡고 어깨에 걸쳤다. 지연이의 뜨겁고 땀에 질척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코치님의 신호에 맞춰 우리는 힘을 주었다. 나는 다리로 지연이를 밀고, 지연이는 내 다리를 밀었다. 10초 후 코치님이 “그만!”이라고 외치자 우리는 힘을 풀었다. 지연이는 부드럽게 내 다리를 주욱 밀었다. 내 무릎과 땀에 젖은 지연이의 얼굴이 내 눈 앞까지 왔다가 멀어졌다.


“후우우….”


나는 숨을 내뱉었다. 뜨거운 숨결이 입술 사이로 빠져나가 신음과 비슷한 소리가 나왔다. 왼다리도 똑같이 스트레칭 한 후, 다음으로 지연이가 눕고 내가 스트레칭 해줬다. 나는 땀에 젖어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지연이의 얼굴과 가느다란 숨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가슴을 바라보며 지연이의 종아리를 붙잡았다. 지연이의 종아리는 땀줄기가 흘러 끈적끈적하고 뜨거웠다. 힘겨루기가 끝나고 지연이가 힘을 풀자 나는 지연이의 다리를 가슴쪽으로 밀었다. 근육이 끊어질까 두려운 마음이 드는 동시에, 지연이의 다리가 교차되어 뽀얗고 탄탄한 허벅지 안쪽 살이 노출된 자세를 정면에서 바라보니 묘한 기분도 들었다.


“너희 목표는 60초를 끊는 거다.”


스트레칭을 마치자 체육샘으로 돌아온 코치님이 말했다.


“전광판에 앞자리 수가 1이 뜨는 것과 5과 뜨는 건 차원이 달라. 앞으로 이 훈련은 일주일에 2번 할 거다.”


이 짓을 일주일에 2번. 나는 벌써부터 죽고 싶어졌다. 나와 지연이는 나란히 바닥에 누웠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자 지연이도 따라서 웃었다. 우리는 선선한 바람이 땀을 식히는 것을 느끼며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샤워를 마치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창문으로 하교하는 학생들의 이야기 소리가 햇빛과 함께 들어왔다. 나는 체육복 자켓 지퍼를 턱까지 올렸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경련하여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곧바로 쓰러질 것 같았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탈의실 바깥으로 나왔다.


“혜정아!”


복도에 연화와 지연이가 있었다. 둘은 마주보며 웃다가 나를 돌아보더니 다가왔다.


“…나 기다렸어?”


“오늘 특별훈련 했다며? 괜찮아?”


“톡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애.”


나는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매고 체육복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었다. 같이 가자는 말도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셋이서 하교하게 되었다.


잔디가 깔린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트랙을 바라봤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나와 지연이가 좀비처럼 기어다니던 곳이었다. 붉은 트랙이 황금빛 노을을 머금었다. 폴리우레탄에 박힌 고무 알갱이 하나하나 다 보일 지경이었다. 연화와 지연이는 뭐가 그렇게 신난지 둘이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이지연, 너는 안 힘드냐?”


나는 괜히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도 죽기 직전이야. 오늘 잠도 제대로 못 잘 걸.”


지연이는 허벅지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허벅지에 팽팽한 근육 라인이 도드라졌다.


“대회가 1달 남았다고 했지? 그럼 너희 이제 체중 관리 해?”


연화가 말했다.


“아무래도? 몸이 무거우면 달리질 못하니까. 체육샘이 밥 먹는 거 사진 찍어서 보내라던데. 먹기 전, 먹고난 후 두장씩.”


“흐음….”


연화는 팔짱을 끼더니 아쉬운 듯 시름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 이제 나랑 떡볶이 안 먹어주겠네?”


“미쳤냐? 절대 안 되지!”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운동선수에게 떡볶이라니. 떡볶이 같은 탄수화물 폭탄은 운동선수에게 죄악이다. 이쑤씨개로 떡 하나 꽂아 올리면 매끈한 떡을 따라 뚝뚝 떨어지는 새빨간 양념, 그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훈훈한 열기, 입에 넣으면 혀 전체에 짜릿하게 퍼지는 맵고 달콤한 맛, 어금니 사이에서 으스러지는 쫄깃한 식감… 절대 안 돼…….


“우리 마지막으로 먹으면 안 돼?”


연화가 내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오늘 딱 마지막으로 먹고 안 먹는 거야. 나 너 아니면 떡볶이 같이 먹을 친구 없단 말이야.”


연화는 몸을 베베 꼬며 내게 매달렸다. 나는 입으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점점 마음이 무너져갔다. 1달 동안 체중관리할 건데… 마지막 치팅데이쯤 가져도 되지 않을까?


나는 구조신호를 보내는 눈빛으로 지연이를 바라봤다. 지연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었다.


“너희가 가면 나도 갈래.”


“혜정아, 지연이도 간다잖아.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가자. 응?”


두 쌍의 눈이 애처롭게 나를 바라본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린다.


“아니… 안 되는데….”



녹색 테이블 위로 커다란 냄비가 등장했다. 떡, 라면사리, 어묵, 소시지가 듬뿍 담기고, 그 중앙에 새빨간 양념이 모셔져 있다. 아주머니가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오더니 냄비 위로 육수가 떨어진다. 가스버너가 점화되고, 그 주변으로 쫄면, 순대, 김밥, 군만두, 단무지, 김치가 나열된다. 우리는 동시에 나무젓가락을 탁 소리를 내며 뜯었다.


“…체육샘한테는 비밀이야.”


“아웅, 당연하지. 나 믿지?”


연화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가락으로 입술을 지퍼 잠그듯 닫았다.


냄비가 보글보글 끓는다. 아주머니가 국자로 냄비를 몇 번 휘젓더니, 이제 먹어도 된다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우리는 전투를 개시했다. 국자와 젓가락이 테이블 위를 오가고, 우리는 갖가지 환호와 신음 소리를 내며 음식을 먹었다.


“…나 이런 분식집 오는 거 처음이야.”


지연이가 쑥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여기 어때? 맛있지?”


연화가 쫄면을 우물우물 씹으며 물었다. 지연이는 “응.”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회 끝나면 또 오자. 너희 상 타오면 내가 사줄게.”


연화는 쉬지 않고 젓가락질 했다. 지연이는 접시를 든 채 웃다가 침울하게 말했다.


“…내가 너희랑 여기 또 와도 돼?”


나와 연화는 동시에 지연이를 쳐다봤다. 연화는 흡입하던 쫄면을 잘근잘근 끊더니 말했다.


“당연하지! 이제 우리 친구잖아!”


참나, 친구는 무슨. 연화는 이런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재주가 있다. 나는 턱을 괴고 무심하게 지연이를 바라봤다.


“친구….”


지연이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고마워. 나 사실… 지금까지 너무 외로웠어. 친구도 못 사귀고, 삼촌은 바빠서 집에 나 혼자만 있고 그랬는데. 너희 만나서 다행이야. 정말 고마워.”


지연이는 베시시 미소 지었다. 얼씨구, 좋단다. 이런 낯뜨거운 말도 하는 걸 보니. 입술 옆에 묻은 떡볶이 소스나 닦지. 묻은 줄도 모르고. 바보 같이.


나는 휴지 한 장을 뽑아 거칠게 지연이의 입술을 닦아주었다.



분식 파티를 끝내고 우리는 기분이 들뜬 상태로 집에 돌아갔다. 가장 가까운 지연이 아파트에 도착했다. 예전에 한 번 왔던 곳이었다. 동 입구에서 지연이와 헤어지기 직전에 연화가 불쑥 말했다.


“우리 사진 찍을래?”


연화는 나와 지연이를 끌어당기더니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나와 지연이는 당황했지만 연화가 카운트다운을 세자 곧바로 포즈를 취했다. 셔터 소리가 울리고 우리는 사진을 확인했다.


“꺄악! 너 이거 뭐야. 볼에 바람 넣은 거야? 너무 귀엽다!”


“아씨, 갑자기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연화는 깔깔대며 나를 놀렸고, 나는 정수리까지 시뻘게졌다.


“이 사진 인스타에 올려도 돼?”


“…맘대로 해.”


“…으, 응.”


연화는 나와 지연이의 허락을 구하더니 폰을 두드리며 인스타에 우리 셀카와 떡볶이 사진을 업로드했다. 이런 별볼일 없는 일상을 인터넷에 올리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연화는 즐거운 듯 보였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 그리고 혜정아, 정말 수고 많았어. 우리 앞으로도 훈련 열심히 받자.”


우리는 인사하며 지연이와 헤어졌다. 지연이는 건물에 들어가면서 어린 아이처럼 팔을 방방 흔들었다. 나와 연화도 손을 흔들었다.


거리는 어둠에 물들어 네온사인이 눈부시게 빛났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나와 연화는 나란히 걸었다.


“지연이랑 친해져서 좋다. 너도 좋지?”


연화가 내게 곁눈질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항상 너한테 친구가 많아졌으면 했거든. 넌 항상 다른 애들한테 까칠하게 대해서 친구가 없으니까….”


“친구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뭐래니? 나 친한 애들 많아.”


연화는 눈을 크게 깜박였다. 나는 투덜대며 말했다.


“그럼 왜 점심을 나랑 먹어?”


“그야 당연히 네가 가장 소중한 친구니까.”


연화의 말이 훅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렸다.


“…혜정아. 왜 네가 지연이한테 신경 쓰는지 알아.”


연화는 한껏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동질감 느끼는 거지? 지연이 부모님 안 계신다고 하니까….”


나는 코웃음 쳤다. 대꾸할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주머니 속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어머니한테 아직도 연락 안 왔어?”


“안 왔어. 죽었나 봐.”


연화는 오랜만에 내 엄마 얘기를 꺼냈다. ‘엄마’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 얼굴도 모르는 엄마. 아빠와 어린 나를 버리고 떠난 엄마. 모순적인 문장처럼 느껴지지 않나.


내가 엄마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은 지갑 속 찢어진 사진을 볼 때뿐이다. 세로로 찢겨진 사진. 나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렸었으나, 아빠는 그걸 주워와서는 억지로 내 지갑에 넣었다. 그것을 지연이한테 들켰던 것이다.


내가 지연이한테 동질감을 느낀다는 연화의 말은 엉터리다. 완전히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나한텐 아빠가 있고, 엄마는 소식은 모르지만 살아 있을 거라는 추측은 할 수 있다. 반면 지연이의 부모님은 사고로 인해 돌아가셨다. 나와 비교도 할 수 없는 불행이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동질감을 느끼겠는가. 내가 뭐라고.


내가 말이 없자 연화도 입을 닫았다. 거리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저마다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면서 걷고 있었다. 그 인파 속을 헤쳐가며 우리는 걸었다.


버스정류장에 다다랐다. 버스정류장 앞에서 연화와 헤어지고 나는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주머니에 넣은 폰이 진동했다. 꺼내서 힐끗 보니 아빠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훈련 언제 끝나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폰을 주머니에 넣고 걸음 속도를 올렸다. 내일부터 다이어트 시작이라고 다짐하면서.






대회가 2주 앞으로 다가왔다.


날이 갈수록 햇볕은 뜨거워졌다. 학교 주변에 핀 벚꽃은 부쩍 더워진 날씨에 자태를 맘껏 뽐내지도 못하고 꽃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이젠 봄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더위가 되었다.


나는 착실하게 훈련을 받았다. 떡볶이는 그날 이후로 입에 대지도 않았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옷을 홀딱 벗고 체중계에 올라가 사진을 찍었다. 체육샘… 아니, 코치님은 내 몸무게에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코치님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카톡을 무시하며 닭가슴살과 바나나를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처음에 죽는 줄만 알았던 특별훈련도 몇 번 하니 적응했다. 인간의 육체는 고문도 적응하게 설계되었는지, 의식이 멀어져가는 와중에도 내 다리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집에 돌아오면 그날 식단과 훈련 성과를 기록했다. 점점 조금씩 줄어가는 시간을 보며 왠지 모르는 쾌감을 느꼈다. 이대로면 정말 60초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기꺼이 철분제를 입에 털어넣고 오렌지 주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향그러운 신맛과 녹슨 쇠맛 또한 나를 기쁘게 했다.



점심 시간이었다. 나는 미리 유니폼을 갈아입고 그 위에 체육복을 입었다. 점심 시간이 끝나면 특별훈련 시작이었다. 나는 연화 교실로 갔다. 복도에서 연화와 마주쳤다.


“…이지연은?”


연화는 혼자였다. 연화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파서 학교 못 나왔어.”


“아프다고?”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오늘 특별훈련 날인데. 하기 싫어서 구라 친 거 아니야?”


지연이가 없으면 나 혼자 특별훈련을 받아야 한다. 아, 그건 상상만 해도 싫은데.


“아프다는데 어쩔 수 없잖아. 대회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몸 관리 해야지.”


연화는 내 팔짱을 끼었다. 우리는 급식실로 걸어가 줄을 섰다. 어째선지 연화와 단둘이 줄을 서는 것이 어색했다. 지연이가 없을 때는 매일 연화와 둘이 줄을 섰었는데. 겨우 3주 함께 다녔다고 지연이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매트에 눕고, 코치님은 내 다리를 스트레칭해줬다. 촌스러운 선글라스를 쓴 코치님은 투박하지만 섬세한 손길로 내 다리를 쭉 늘렸다.


“둘이서 훈련 받다가 갑자기 혼자 하려니 힘들지?”


코치님은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동도 같이 하는 동료가 있어야 힘이 나는 법이야. 그래서 지연이도 대회 나가기로 했을 때 내가 얼마나 기쁘던지.”


나는 입 다물고 스트레칭에 집중하라고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힘들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서 코치님이 하는 말을 들었다.


“지연이는 갑자기 아파가지고 말이야. 마침 오늘 유니폼 나왔는데.”


“…유니폼이요?”


“지연이 유니폼 없어서 체육복 입고 훈련했었잖아. 오늘 나왔어. 오늘 딱 주려고 했는데.”


“저한테 줘요. 저 이지연 집 알아요.”


나도 모르게 내 입이 움직였다. 아니, 이런 귀찮은 일을 왜 한다는 거야?


“오, 그래? 그럼 부탁할게. 가다가 쓰러지는 건 아니지?”


코치님은 싱글벙글 웃으며 내 햄스트링을 파열시킬 작정으로 다리를 꺾었다. 인간의 몸이 이런 각도로 휘어져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내 다리가 찢어졌다. 나는 우악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코치님은 낄낄 웃었다.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높은 아파트 건물을 올려다봤다.


연화는 학원 때문에 같이 못 간다고 해서 혼자 왔다. 아니, 평소에 학원을 밥 먹듯이 빠지던 애가 왜 하필 오늘 학원을 가겠대.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나는 걸음을 옮겼다. 가방 안에서 유니폼 포장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연이는 많이 아픈지 내 연락을 받지도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집을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지연이 집 현관문 앞에 서니 안쪽에서 왁자지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연이는 옛날에 친척 어른이 많이 바쁘셔서 보통 집에 혼자 있다고 말해줬었다. 하지만 지금은 소란스럽다 못해 시끄러울 정도로 집안이 난리였다. 혹시 손님이라도 찾아온 걸까? 나는 수상한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나는 안에서 나온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눈을 찌푸렸다.


“…누구세요?”


처음 보는 남자애가 멀뚱하게 나를 쳐다봤다. 분명 지연이는 친척 혼자 사는 집이라고 했다. 자식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연이 보러 왔는데. 여기 지연이 집 아닌가요?”


나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남자애는 나를 경계하듯 노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야, 민수야! 네 여친 친구 왔는데? 이거 어떡하냐?”


그러자 거실 안쪽에서 거만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해!”


남자애는 문고리에서 손을 놓고 부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나는 체육복 주머니에 양손을 푹 꽂아넣은 채 천천히 현관으로 들어갔다. 내 뒤로 현관문이 닫히고, 삑삑거리며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팽팽하게 땡겼다. 거실에 가까워질수록 떠드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거실 문을 열어젖혔다.


내 눈에 보인 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과자 봉지와 치킨, 소주병, 맥주캔, 그리고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남자애들이었다. 대여섯 명은 있는 것 같았다. 검은 티셔츠 위에 풀어해친 와이셔츠를 걸친 남자애는 소파에 기대앉은 채 기분 나쁘게 웃으며 나를 꼴아봤다. 이 무리의 우두머리처럼 보였다. 남자애 옆에 지연이가 벌벌 떨며 겁먹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남자애의 오른팔이 지연이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혜정아….”


지연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남자애가 넉살 좋게 말을 건넸다.


“지연이 친구라고? 너도 육상하는 애야? 다리 예쁘다! 너도 같이 놀래?”


남자애는 노골적으로 내 다리를 쳐다봤다. 나는 체육복 반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나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니들 뭐냐?”


“지연이 전 학교 친구들. 나는 지연이 남친.”


남자애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주변 남자애들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지연이가 말도 없이 전학을 가버려서 말이야. 서운하게…. 그러다가 인스타에 올라온 사진 보고 서프라이즈로 찾아왔지. 이런 남친 어딨냐? 화도 안 내고. 그치?”


남자애는 왼손으로 지연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지연이는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지만 아무 반항도 하지 못했다.


나는 코웃음쳤다.


“남친은 무슨. 이렇게 단체로 찾아와서 괴롭히는 게 무슨 남친이야?”


나는 한껏 거들먹거리며 그 새끼를 도발했다.


“여자 꼬실 자신 없어서 힘만 믿고 나대는 거지. 찌질한 병신 새끼.”


그 새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새끼가 내 눈을 노려봤다.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왔다. 말라보이는 몸집에 비해 키가 컸다. 나는 그 새끼의 눈을 피하지 않고 올려다보았다. 폰을 쥐고 있던 손을 주머니 밖으로 천천히 꺼냈다.


“…입이 싸가지가 없네. 운동만 하느라 머리도 근육으로 차서 그런가?”


“대가리에 가오만 가득한 너만 하겠어?”


시끄럽게 떠들던 남자애들도 숨죽이고 나와 이 새끼를 바라봤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지연이는 울먹거리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무 말 없이 눈싸움을 이어가는 순간, 그 새끼의 어깨가 크게 움직이더니 커다란 주먹이 내 얼굴로 날아왔다.


남자애들은 이게 문제다.


지가 세상의 그 어떤 여자보다 힘이 센 줄 안다.


그래서 운동부 여자애한테도 깝치는 거다.


나는 고개를 살짝 뒤로 움직여 주먹을 피했다. 동시에 허리에 회전을 주어 온 힘을 다해 오른발로 그 새끼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다리와 다리가 맞닿자 ‘빠각’하는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새끼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날라가 찌그러졌다. 곧바로 일어서려고 했지만 갓 태어난 기린처럼 다리를 후들거리가다 불쌍하게 쓰러졌다. 왼다리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육상 선수에게 차인 소감이 어때? 병신 새끼야.”


내가 웬만하면 싸울 때 다리 안 쓰는데. 저 새끼는 자업자득이다. 다리 안 부러졌을려나? 어우, 속 시원해라.


“이 썅년이!”


남자애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내게 달려들었다. 소주병이 쓰러지고, 맥주캔이 깡깡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나는 가까운 남자애한테 주먹과 발길질을 날렸다. 그러나 그 많은 인원이 죽기살기로 덤벼들자 어쩔 수가 없었다. 최대한 저항했지만 나는 결국 바닥에 넘어져 남자애들에게 팔다리가 붙잡힌 채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 시발 새끼들이!”


남자 새끼들이 여자애 하나 못 이겨서 5명이나 달라 붙는 게 말이 되나. 자존심라곤 좆도 없는 찌질한 새끼들뿐이다.


바닥에서 뒹굴뒹굴 구르던 그 새끼가 일어나더니 절뚝절뚝 걸어왔다.


“푸하핫, 존나 아파보이는데? 병원 안 가도 되겠냐?”


“너… 이 시발년….”


그 새끼가 내 위를 올라탔다. 내 멱살을 잡더니, 분노로 가득찬 얼굴로 말했다.


“언제까지 나댈 수 있나 보자.”


그 새끼는 고개를 돌려 멍청히 서 있던 남자애한테 말했다.


“야, 폰으로 이 년 찍어.”


남자애는 허둥대더니 폰을 꺼내 동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 새끼는 헤벌쭉 웃더니 내 체육복 지퍼를 내렸다. 얇은 박스티가 드러났다. 그 새끼는 티셔츠 아랫단을 콱 붙잡았다.


“여자애가 나대면 어떤 꼴이 되는지 잘 배워두라고.”


“혜정아!”


지연이가 애처롭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와 그 새끼의 기분나쁜 숨결이 번갈아가며 내 귓가에 닿았다. 그 새끼가 서서히 내 티셔츠를 위로 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내 가슴이 드러나기 직전에 그 새끼의 동작이 멈췄다. 그 새끼가 당황하며 고개를 올려 현관문을 바라봤다.


“지연아!”


나는 내 팔을 잡은 남자애들을 꽉 붙잡고, 다리에 힘을 주어 내 다리를 잡은 남자애들을 꾹 눌렀다.


“달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연이는 소파에서 튀어나와 현관문을 향해 달렸다. 그 새끼는 “안돼!”라고 소리치며 붙잡으려고 했지만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다리를 후들거리며 발라당 넘어졌다.


그 사이에 지연이는 현관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깨끗한 정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신고 받고 왔습니다. 잠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혜정아! 지연아!”


남자 둘 사이를 비집고 연화가 달려왔다. 연화는 내가 바닥에 제압당한(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가 제압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며 남자들에게 외쳤다.


“얘네에요! 얘네가 제 친구들 폭행했어요!”



내가 아무 대책 없이 싸운 게 아니다.


나는 거실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폰을 조작해 연화에게 전화했다. 연화 번호는 단축키로 저장해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화는 학원 수업 도중에 몰래 전화를 받느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할 게 분명했다. 들킬 일도 없다. 전화를 받으며 상황을 파악한 연화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학원을 내팽겨치고 본인이 직접 달려올 것까지는 예상 못했지만.


거실에 벌어진 술판과 내가 남자애들한테 제압당한 현장, 그리고 그 새끼들이 직접 찍은 영상. 증거는 차고 넘쳤다. 그 새끼들은 무력하게 경찰에게 끌려갔다. 나는 끌려가는 그 새끼들 뒷모습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다.


“혜정아!”


지연이가 내게 와락 안겼다.


“미안해… 미안해… 나 때문에…. 괜찮아? 안 다쳤어?”


“괜찮아. 그리고 일부러 져 준 거야. 진심으로 싸우면 내가 이겨.”


나는 지연이의 등을 토닥이며 괜한 허세를 부렸다. 연화도 울면서 우리를 안았다.


“나도 미안해…. 괜히 내가 인스타에 사진 올려서….”


“네가 뭐가 미안해. 인스타에 올린 사진 보고 쳐들어온 저 새끼들이 잘못한 거지.”


거실은 그새 눈물바다가 되었다. 지연이와 연화는 펑펑 울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둘을 꼬옥 안아주었다.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내가 지연이를 찾아온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지연아, 유니폼 가져왔어. 네 거야.”


나는 가방에서 유니폼을 꺼내 지연이에게 건내줬다. 비닐이 전등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유니폼 중앙에 우리 학교 이름이 큼직하게 써 있었다.


지연이는 유니폼을 받아들고 멍하니 쳐다보더니 더욱 크게 울면서 내게 안겼다.






뜨거운 햇볕이 따갑게 내려쬐는 붉은 트랙에서 달궈진 고무 냄새가 일렁거렸다.


나는 출발선 앞에 무릎을 꿇고 출발대에 발을 대 자세를 잡았다.


바로 옆 트랙에 지연이가 있었다. 지연이는 나와 같은 유니폼을 입었다. 우리의 유니폼에 같은 학교 이름이 써 있었다.


휘슬이 울렸다.


손가락으로 땅을 짚고, 엉덩이를 높게 치켜들었다. 긴장되는 순간, 경기장에 있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총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들리는 것은 심장 소리와 펄럭이는 깃발 소리뿐이었다.


총이 울렸다.


총소리가 들리자마자 선수들이 일제히 뛰쳐나갔다. 처음 100m 구간. 전력의 90% 정도로 달리는 구간이다. 나는 붉은 트랙을 따라 다리를 뻗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근육이 펌핑되었다. 순식간에 숨이 차올랐다.


커브 구간. 나는 어깨를 구겨 넣으며 바깥으로 튀어나가려는 몸을 끌어당겼다. 속도를 적절히 낮춰 페이스를 조절했다. 스파이크가 트랙에 닿을 때마다 탁탁거리는 소리가 두뇌를 강타했다. 근육이 점차 단단해졌다.


선수들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경쟁했다. 이 구간까지는 대부분의 선수가 거의 같은 라인에 있다. 중요한 것은 다음 구간이다.


250m 구간. 상위권과 하위권이 나뉘기 시작했다. 나와 지연이는 한 몸처럼 움직였다. 1달 동안 죽을 각오로 훈련을 함께 견뎌온 우리였다. 여기서 나가떨어질 수는 없었다.


마지막 구간. 스퍼트를 올려 끝까지 내달려야 한다. 허벅지 근육이 딱딱하게 굳고, 혈관에 펄펄 끓는 용암이 흐른다. 신경이 끊어지고 재연결되며, 의식이 처참하게 아우성친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져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항상 연습해왔던 것처럼 보폭을 넓히며 다리를 움직였다.


나는 직감했다. 이것이 내 생애 최고의 기록이다.


이대로만 달리면 된다.


그러나 이변은 언제나처럼 찾아왔다.


내 옆에서 함께 달리던 지연이의 모습이 휙 사라졌다. 스파이크가 트랙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와 짧은 비명 소리가 내 귀를 스쳤다가 멀어졌다. 트랙에서는 들려서는 안되는, 사람의 몸이 딱딱한 우레탄 바닥에 처박히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연이가 넘어졌다.


이걸로 끝이다. 이대로 계속 달리면 나는 전국대회에서 1등을 할 것이고, 지연이를 이긴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다.


드디어, 내가 승리한다.


하지만 내 몸은 얄궂게도 더이상 속도를 내지 않았다.


연료가 고갈된 자동차처럼 내 다리가 서서히 멈췄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뒤돌았다.


형형색색의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순식간에 내 곁을 지나치고, 몇 십 미터 떨어진 거리에 지연이가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지연이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달렸다.


붉은 트랙을 역주행하여 지연이에게 달려갔다.


관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스탠드에서 목에 핏줄을 세우며 고함치는 코치님의 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허벅지 근육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탓에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지만 나는 계속 달렸다.


심장이 폭발하는 그 순간, 나는 지연이의 이름을 불렀다.



<질투는 나의 것>, 20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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