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한 점에 4천억 원, 말이 되는건가 싶다면
위 작품은 윌렘 드 쿠닝의 <Intercharge>입니다. 한화 약 4,474억 원에 판매되었죠.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싼 미술품 2위에 랭크되어 있습니다. 추상표현주의는 비쌉니다. 잭슨 폴록의 <No.17A>는 2,979억 원에 판매됐고, 마크 로스코의 <No. 20 (Yellow)>는 2,977억 원에 판매됐습니다. 이 외에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장르는 인상주의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이죠.
추상표현주의는 전문가의 설계 하에 만들어지고 지원받아 정부차원의 지원으로 세계적 장르가 되었습니다. 미술계 구조상 얼마든 장르를 띄우는 것은 가능한 덕분이었죠. 하지만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미술시장에는 내부자 거래 규제가 없어 이득을 위해 싸거나 비싸게 팔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살 생각 없는 사람에게 작품을 억지로 팔 순 없습니다. 그렇다면 추상표현주의는 어떻게 이렇게 비싸게 팔릴까요?
높은 금액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물론 이게 다 충족된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비싸게 팔리는 건 아니지만, 비싼 작품은 모두 이 조건을 가지고 있죠.
첫째, ‘작품 제작 과정이나 기술력이 아닌, 작품 자체가 지닌 콘셉트와 스토리가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가’. 해당 작품이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와 스토리를 갖추고 있다는 기대가 생기면 가치는 수직 상승합니다. 기업의 성과, 성장 기대치에 따라 주식 가격이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죠. 추상표현주의는 미국이 세계 미술의 흐름 주도권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가져오게 한 장르라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와 스토리를 갖습니다.
둘째,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가 보이는 작품인가’. 미술사적 의의를 갖는 작품들은 대부분 이전 미술 흐름에 반대되는 움직임을 보이거나,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 작품들입니다. 인상주의 작품이 그랬고, 뒤샹의 <샘>이 그랬죠. 추상표현주의는 유럽 예술을 부정하면서 미술사적 역사를 새롭게 재편하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각 예술가들은 물감을 뿌리거나, 끝없이 덧칠하는 등 이전에 본 적 없던 기법을 선보였죠. 또 막대한 크기의 작품 사이즈 역시 이례적이었습니다.
새로운 예술적 움직임 Movement이 장르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 움직임이 한참 활발할 때는 ‘운동'정도로 치부되다가, 10년이나 20년쯤 후에야 기록으로 남으면서 장르가 되죠.
한편, 미술사에서 ‘중요한’ 장르로 여겨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인상주의는 당시에 비주류 예술가들의 객기로 치부되었죠. 오늘날에는 가장 비싼 장르가 되었지만요. 또 당시엔 주요 장르인 것처럼 보였지만 미술사 책에서 이름조차 볼 수 없는 사조도 있습니다. 이처럼 미술에서 장르로 자리매김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고 함부로 예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추상표현주의는 달랐습니다. 전략적으로 ‘잘 팔리는 장르'가 되기 위해 태어났죠. 만들어진 지 5년 만에 장르로 자리매김했고, 빠른 시간에 매우 높은 금액에 거래되는 사조가 되었습니다. 팝아트가 있기 전에, 미국이 유럽을 꺾고 세계적인 미술 강국이 되게 만든 장르이기도 하고요.
추상표현주의는 철저한 설계 하에 만들어졌습니다. 미국 정부와 미술 기관, 전문가들이 합심해 만들어낸 성과죠. 함께한 곳은 CIA(미중앙정보국), MoMA(뉴욕현대미술관)등이 있습니다. 모두 막강한 권력을 가진 기관들이죠. 이들이 전략을 세운 데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었습니다.
20세기까지 현대미술의 중심지는 유럽으로 여겨졌습니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다양한 국가가 중심지 노릇을 했지만 예술의 중심은 유럽을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1939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며, 유럽의 예술가들은 더 이상 유럽에서 작품 활동을 하기 어려워졌죠. 많은 예술가들은 안전한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 시기 즈음 미국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권력을 키우기 위해 뉴딜정책을 시행 중이었습니다. 미술 부분에서는 공공미술 작품을 제작하는 ‘연방미술프로젝트 Federal Art Project’가 시행 중이었죠. 연방미술프로젝트에는 화가, 조각가 등 만 명가량의 예술가가 참여했습니다. 미국은 이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를 진행하고, 해외 투어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미술은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죠.
당시 수혜를 받은 예술가 중, 우리에게 익숙한 예술가로는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윌렘 드 쿠닝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뉴욕파' 화가들이라 불렸고, 오늘날에는 ‘추상표현주의' 화가라 분류됩니다.
추상표현주의는 ‘형태는 추상적이지만 내용은 표현적이다'라는 점에서 이름 붙여졌는데요. 원래는 칸딘스키의 작품을 묘사하며 이런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점차 뉴욕파 작가들에게 이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작업이 추상표현주의의 특징을 잘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죠.
작가마다 조금씩 디테일은 달랐지만, 큰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압도적인 캔버스 크기, 작품을 맞닥뜨리는 순간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직관적인 강렬함. 때문에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감상하는 가이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작품을 다 보기 위해 멀리서 감상하는 것이 아닌, 압도감을 느끼기 위해 팔 하나 너비 간격에서 가까이 감상하라는 것. 이는 관객이 작품 앞에서 작아지는 생경한 느낌을 줬고, 작품이 가진 압도감을 극대화했습니다.
이처럼 추상표현주의는 압도적인 사이즈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작가마다 담아내는 기법은 달랐습니다. 잭슨 폴록은 캔버스에 물감을 흩뿌리는 ‘액션 페인팅’ 기법을 사용했고, 마크 로스코는 물감을 여러 겹 덧칠하는 ‘멀티폼’ 회화를 선보였죠. 모두 전에 없던 새로운 기법이었습니다. 작가 개개인의 독특한 기법과 압도적인 사이즈라는 공통된 특징은 추상표현주의가 장르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매력적인 특징이었습니다.
장르가 만들어지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평론가입니다. 당시 미국에는 유럽에서 이주해온 예술가와 함께 평론가들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현대미술 이론의 정신적 지주라 불리는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대표적인데요. 그린버그는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논리적인 평론을 발표합니다. 이전 유럽 미술의 장르들을 예시로 들며,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는 전례 없는 독특한 장르고, 고유한 특징을 지닌 우월한 사조라 평론했죠. 유대계 미술 평론가인 ‘헤럴드 로젠버그’ 역시 추상표현주의에 대해 ‘가장 미국적인 스타일의 예술'이라 분석하면서 추상표현주의에 이론적인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다른 예술장르와 달리 미술은 유독 권위자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장르입니다. 대중의 선택이 있기 전에, 전문가가 내리는 평가로 작품이 큐레이션 되죠. 대중은 권위자들이 큐레이션 한 것을 토대로 선택하게 됩니다. 추상표현주의는 미술의 이런 특성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정부의 지원으로 전 세계에 선보여졌고, 장르에 권위를 부여하는 평론가들의 어시스트가 있었죠. 대중은 이들이 설계한 흐름 안에서 미술을 받아들였습니다.
덕분에 추상표현주의는 미술계의 고유한 장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2차 세계대전 여파로 유럽 예술이 주춤한 사이 떠오른 덕분에 미술계 흐름도 미국으로 가져올 수 있었고요.
추상표현주의가 전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 때문에 일부에서는 정치적 수단, 문화선전도구로 활용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수정주의'가 바로 그 사례죠. 수정주의(修正主義, revisionism)는 기존 사상을 해당 사상의 전통적 입지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개량, 변질, 수정하는 행위 또는 그러한 이념을 뜻하는 용어로 쓰입니다. 수정주의에서는 냉전시기와 겹치는 추상표현주의의 발생 시기, CIA-MoMA-추상표현주의 삼각관계로 인해 이런 음모론적 관점을 내세웠지만, 1980년대부터 수정주의자들의 논리는 잘못되었음이 드러납니다.
미국을 위한 예술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장르를 띄운 것은 맞지만, 당시 정부차원에서는 추상표현주의뿐만이 아닌 다양한 양식의 미술을 미국 내, 미국 외 국가에 소개했습니다. 또 추상표현주의는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와는 상반된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죠. 오히려, FBI가 추상표현주의자들을 요주의 인물로 분류, 감시했을 정도입니다. 이들이 문화적으로는 국가에 도움이 될지언정, 정치적 수단으로써 활용하기엔 적절치 않다고 본 것입니다.
수정주의자들의 시각은 오늘날 오히려 추상표현주의를 편협하게 바라보는 시각으로 여겨집니다. 자국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설계된 장르는 맞지만, 정치적 목적은 없었기 때문이죠. 추상표현주의는 오늘날 가장 비싸고 잘 팔리는 장르가 되었습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하나의 신화를 탄생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참고문헌
아트캐피털리즘, 이승현, 아트북스, 2021
발칙한 현대미술사, 윌 곰퍼츠, RHK, 2014
현대미술투자교과서, 도쿠미쓰 겐지, 앵글북스, 2021
바넷 뉴먼의 미국적 숭고: 추상표현주의의 태동기를 중심으로, 이상윤,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제 52집, 2020
문화냉전 속 추상미술의 지형도, 이상윤
추상표현주의와 정치, 정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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