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국 사실주의 회화의 아버지, '에드워드 호퍼 Edware Hopper (1882-1967)'. 호퍼의 작품은 도심 속 건물 사이사이,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차가운 인상을 풍기는 색감과 그 안에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려냅니다. 아름다운 작품 속 사람들의 표정에선 어딘가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호퍼의 작품 속 고독함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요?
호퍼는 어린 시절, 소심한 아이로 불렸습니다. 친구들은 키가 크지만 말랐던 호퍼를 '메뚜기'라 부르며 놀리곤 했죠. 호퍼는 자신을 놀리는 친구들을 피해 방에서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호퍼는 특히 스케치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죠.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부모님에게 화가가 되겠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요. 당시에는 삽화 작업이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던 시기였습니다. 때문에 호퍼의 부모님은 호퍼를 뉴욕에 있는 삽화 전문 상업 미술학교(Correspondence school of Illustrating)에 입학시켜요.
호퍼는 대학에서 좋은 수업을 들을 수 있었고, 인생을 바꿀 스승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후의 일이고, 당시 호퍼는 작품이 하나도 팔리지 않아 힘들어 했어요. 호퍼가 그림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건 그의 나이 42세 때부터입니다. 이전까지 호퍼는 오랜 기간 동안 상업 광고와 삽화 작업을 해나가며 돈을 벌었죠.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 작업을 통해 그는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해봅니다.
삽화에는 에칭 작업이 필수입니다. 에칭은 일종의 판화 기법으로, 색깔을 쓰지 않고 흑백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게 특징입니다. 때문에 에칭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호퍼는 다양한 구도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어요. 색을 배제한 채, 오직 그림 속 요소의 배치만으로 마치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듯 극적인 풍경을 그려낸 것이죠.
호퍼의 작품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 합니다. 고립된 풍경 속, 인물을 작게 그려낸 게 특징인데요. 삭막하고 고립된 느낌을 자아내지만, 왠지 인물의 사연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호퍼는 이처럼 작품 속 사람이 작품 밖 사람과 소통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는 이를 '내부의 소통', '대화가 완결되는 느낌'이라고 불렀어요. 이 느낌을 얻을 때까지 작품을 끊임없이 수정하며 다시 그렸죠.
고독을 그려내면서도 누구보다 소통되는 작품을 그리길 바랐던 호퍼, 그의 작품엔 몇 가지 키워드가 있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사 브릭스 Asa Briggs (1921-2016)'에 따르면,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충격적인 도시가 있다고 합니다. 20세기 초에는 뉴욕이 바로 그 충격적인 도시 중 하나였죠. 역동적인 경제 상황과 다양한 인종이 모이는 도시, 다른 도시에 비해 빠르게 대도시로 성장한 뉴욕은 흥미로운 장면들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높은 마천루,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민들, 거리의 예술가들 등 말이죠.
여러 예술가들은 뉴욕의 생활상을 작품 속에 그려냈습니다. 이처럼 뉴욕의 일상을 그린 화가 그룹을 '애슈캔 학파 Ashcan School'라고 부르는데요. 이들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상인 등을 소재로, 뉴욕의 삶을 작품에 그려냈습니다. 호퍼 역시 이 애슈캔 학파의 전통을 이어간 예술가 중 한 명인 데요. 이에는 호퍼가 대학에서 만나 자신의 인생을 바꿔 준 스승, '로버트 헨리 Robert Henri'의 영향이 컸다고 해요.
헨리는 많은 뉴욕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준 스승으로도 유명합니다. 학생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을 가르치거나 이론을 설명하기보다, '예술가의 철학적 사고방식'을 심어주려 했죠. 헨리는 예술가처럼 사고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사는 곳을 기반으로 해 스스로 표현할 방식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살고 있는 곳에서 찾는 것이죠.
그러면서 유럽의 예술가의 작품을 가르치고, 학생들에게도 외국으로 나갈 것을 장려했습니다. 당시 파리를 비롯한 유럽 미술계는 야수파, 입체파, 추상의 발생 등으로 혁명적인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는데요. 헨리는 학생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아는 것 만큼이나 이런 진보적 미술을 많이 접하는 걸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후에 호퍼는 헨리에게 배운 이 철학을 자신의 예술 인생에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뉴욕에 살고 있는 본인의 정체성을 담아내면서도, 유럽 미술의 좋은 점을 잘 차용해 가져왔죠.
에드워드 호퍼는 사실주의 화가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주의에서 말하는 '사실'은 대상과 똑같이 그린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요. 사실주의의 '사실'은 사회의 현실이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의미죠. 때문에 호퍼의 작품을 볼 때는 호퍼가 작품을 통해 어떤 현실을 보여주려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은 19세기 후반, 천혜의 풍부한 자원과 프론티어 정신으로 순식간에 세계 제일의 공업국, 상업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산업화의 발달, 그리고 세계대전으로 주춤거리기 시작했고, 전후 사람들은 산업의 발달과 과학적 진보가 가져다준 결과에 좌절감과 혼란을 겪게 되었죠.
1929년의 경제 공황은 그 정점을 찍었습니다. 갑자기 밀어닥친 주식의 폭락과 달러의 하락은, 20년대의 물질적 풍요에 종말을 고했죠. 공황 이후 찾아온 1930년대의 위기는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위기였습니다. 미국의 경제는 순식간에 붕괴되었고,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환멸과 반항, 냉소, 허무의 감정들을 갖게 되었죠.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호퍼의 그림은, 그 시대의 현대인이 겪고 있는 복잡 다양한 감정들을 표현했습니다. 당시 많은 애슈캔 학파에서는 뉴욕의 마천루들이나 첨단 시설을 갖춘 건축물을 그려내곤 했습니다. 발전하는 도심의 풍경이 뉴욕을 가장 잘 보여줄 거라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호퍼는 반대로 교외의 주택에 주목합니다. 도시가 발전할수록 점점 더 설 곳을 잃어가는 옛 양식의 주택들은, 그에게 현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어떤 소외된 경험이나 추억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그림 속에 이를 그려냈죠.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조용하고, 침체된 정적만이 감도는 도시를요. 이는 곧 대공황 시대 사람들의 감정을 담아내는 풍경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942년 <밤샘하는 사람들 Nighthwaks>을 완성한 후, "이 그림은 내가 밤 거리를 어떻게 상상하는지에 관해 잘 보여준다. 아마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대도시에서의 고독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호퍼는 이처럼 현대인의 고독, 외로움, 절망감, 무력감, 무관심과 같은 모든 심리적 상태를 아우르는 '소외'의 개념을 그의 작품 세계 전반에 지속해 그려냈습니다.
호퍼는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많이 하는 작가였습니다. 사람들이 본인 작품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거나, 작품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할 경우, 이에 대한 설명을 바로 내놓았죠. 호퍼의 이런 점은, 작품과 감상자의 소통을 가장 중요시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런 호퍼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그림 속 요소는 바로 '창'이죠.
창은 호퍼의 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됩니다. 호퍼가 1926년 그린 이 작품 <오전 11시>는 창의 요소를 적극 활용한 작품입니다. 작품엔 알몸의 여인이 신발만 신은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요. 가장 유약한 상태로 밖을 바라보는 여인은 최소한의 소통만을 바라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낸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방 바깥쪽 창문으로는 비인간적인 느낌을 주는 도시가 보이는데요. 그가 내다보고 있을 도심에도 또다른 현대인이 앉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런 감상은 그림 속 여인을 바라보는 관객이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는 풍경이죠. 호퍼는 이처럼 창을 통해 관객을 작품으로 끌어들여, 작품의 분위기를 확장시킵니다.
호퍼 회화 속 '창'은 이중적입니다. 외부의 빛을 내부로 통과시키는 틈이자, 외부의 광경을 볼 수 없게 하는 차단장치로도 그려지죠. 열리고 닫힘, 바라봄과 보임, 시선과 응시의 교차가 모두 창을 통해 일어납니다. 호퍼가 그림을 그렸던 1930-50년대의 전쟁, 대공황 등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연관시키면 창의 의미는 또 달라집니다. 밖으로부터 나를 안전하게 지키고, 밖과 나를 단절시키는 역할을 하죠.
호퍼의 작품 속 창문들은 마치 유리가 없는 것처럼 깨끗합니다.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창문도, 또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창문도 티 한점 없이 깔끔해서 마치 창문이 없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호퍼의 작품 속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창문들은 '빛'과도 연결됩니다.
호퍼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실내공간엔 크게 두 가지의 빛이 있는데요.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 그리고 불분명한 위치에서 쏟아지는 인공채광이죠. 사방에서 쏟아지는 빛은 작품 속 밝기와 톤을 균일하게 만들어 공간이 가지는 질감과 패턴을 최소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실제적인 색채를 표현한다기보다 작가의 심리적 의도를 투영했다고 볼 수 있죠. 호퍼는 이 빛을 통해, 그림 속 풍경을 극적으로 그려냅니다.
호퍼는 24살 때 유럽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당시 대학에서 큰 영향을 준 스승, 로버트 헨리에게서 해외 많은 작가를 배운 영향이었죠. 당시 호퍼는 파리,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을 9개월 간 여행하며 다양한 풍경과 사람, 작품을 접했는데요. 이때 그가 가장 많은 영감을 받은 건, 인상주의 회화 작품들이었습니다. 수많은 인상주의 작품을 보며 호퍼는 빛의 표현에 매료됩니다.
후에 호퍼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고 해요. "예전에 보던 것과 빛이 매우 다르게 보였다. 그늘조차도 빛나고 있으며, 모든 사물이 빛을 반영하고 있었다. 심지어 다리 밑, 그늘 속에서도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유럽 여행 시작 직후, 한 달 동안 호퍼는 빛을 연구한 습작을 끊임없이 그렸습니다. 호퍼는 이후 두 차례 더 파리에 방문해,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을 표현하는 방식을 공부해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기도 했죠.
호퍼의 풍경에서 주요 역할을 하는 빛은 다른 미국 인상주의자들이 도입한 프랑스의 부드러운 공기와 빛이 아닌, 미국의 강렬한 햇빛과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늦은 오후의 어둡지만 강한 빛이었습니다. 맑은 햇살과 그 햇살이 만들어내는 그늘은 고요함, 적막감과 섞여 묘한 평온함을 자아냅니다.
호퍼의 작품에서 빛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빛이 현실을 표현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며, 화가가 관찰하는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이야기했죠.
호퍼의 1949년 작, <정오>에는 빛의 표현이 아주 극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해변 위 덩그러니 있는 집은 정오라는 제목에 맞게 강한 햇빛을 받고 있죠. 집의 가장 왼쪽에 위치한 창문엔 벌써 햇빛이 조금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옆으로 보이는 문엔 한 여인이 서 있고요.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집과 달리, 여인이 서있는 문 안쪽은 아직 빛이 닿지 않아 어둡습니다. 햇빛을 받고 있지만 어둠 속에 있는 금발의 여인은 마치 자유를 갈망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집 안이 너무 어두워서 일까요? 정오의 햇빛을 강하게 받고 있는 여인의 얼굴은 어딘가 공허해 보입니다.
빛을 호퍼를 대표하는 수식어인 외로움, 공허함의 분위기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는 다양한 장소에서의 빛의 효과를 지속적으로 탐구했는데요. 이 작품, <정오>에서 호퍼는 집안과 집 밖을 빛을 통해 한번 더 분리하며 극적인 면모를 드러냅니다.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작용을 만들어내는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의 햇빛을 그림 속에 차용해 격동적이고 극적인 요소로 작동하게 만든 것이죠.
호퍼는 늦은 나이에야 작가로서 인정받은 인물입니다. 1913년, 31살 때 작품을 한점 팔고 마흔이 넘을 때 까지 작품을 한 점도 팔지 못했죠. 그의 작품이 활발하게 판매되기 시작한 건, 1924년 진행된 <미국 작품 10편> 전시 덕분이었습니다. 이 전시회에 전시한 호퍼의 수채화 작품들이 상업적, 예술적으로 큰 호응을 얻으면서, 호퍼는 비로소 상업 미술을 중단하고 회화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죠. 호퍼의 회화가 갖는 특유의 소외의 이미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로, 호퍼는 이 시기부터 마지막 작품에 이르기까지 줄곧 사실주의 화풍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인기 장르는 추상표현주의였습니다. 호퍼의 사실주의는 이후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평론가, 관객, 미술 관계자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죠. 호퍼 작품에 대한 관객의 열렬한 호응은 1933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첫 회고전에서부터였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성공적 활동을 이어간 호퍼는 1950년 휘트니 미술관 이후 대규모 회고전을 꾸준히 개최합니다. 1964년 휘트니 미술관 회고전, 1965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와 디트로이트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열린 회고전에서는 평론가, 미술 관계자, 작가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했죠.
인생의 젊고 반짝이던 시기 대부분을 외주 삽화 작업으로 보내고, 고령이 되어서야 화가로 주목받은 호퍼는 우리에게 꾸준함과 성실함이 가장 큰 재능임을 상기시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호퍼의 이야기는 '사실주의 회화의 대가', '빛과 창으로 빚어낸 극적인 고독함' 정도일 수 있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많은 좌절과 노력이 있었던 것이죠.
호퍼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도시 환경에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항상 고립된 익명의 이방인들이며 일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이기도 하면서 아무도 아니기도 한 이 인물들은 호퍼의 작품 속 메시지를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죠. 도심 속 고독을 그려낸 호퍼의 작품 속,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에 주목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빋피는 다음에 더 흥미로운 이야기로 찾아올게요.
✍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세계를 흥미롭게 읽었다면, 조각 작품의 개념을 바꾼 공대생 '알렉산더 칼더'의 이야기도 함께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