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by BIG H

조화가 군인처럼 도열해 있는 빈소 몇 개를 지나치니 상복을 진열해 둔 방이 나왔다. 장례식장 외진 곳에서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방이었다. 누군가 죽어야만 입을 수 있는 옷, 누군가에게 계속 대물림되는 옷이 한가득 있었다. 망자를 보내는 흑백 옷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여러 번 탈착 끝에 몸에 맞는 옷을 골랐고 셔츠와 넥타이를 챙겨 입으니 그제야 상주가 된 것이 실감났다. 멍한 기분에 텁텁한 여름 공기까지 더해져 좁고 캄캄한 공간에 갇힌 듯했다.


벌써 열흘이 지났다.

아버지가 일흔일곱 해를 사시고 할머니, 할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당신 어버지를 보낸 지 63년 후, 당신 엄마를 보낸 지 스무 해 후였다. 같은 자리에서 당신 막냇자식을 먼저 보낸 지 다섯 해가 지난 후였다.

뻑뻑한 가슴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구미 차병원 중환자실 앞에 도착하니 여러 가족이 속닥속닥 모여 있었다. 다들 불안과 초조로 가슴을 졸이고 있을 터였다. 이윽고 중환자실 문이 열렸다.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마치 냉동창고 같은 서늘함이 밀려왔다. 찬 바닷물에 빠진 듯 심장이 뻐근했다. 이미 중환자실 밖에서 잔뜩 긴장했던 터라 더 그랬을 것이다. 중환자실 입구에 마련된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지렁이라도 있는 것처럼 거세게 씻어내렸다.


병실에 누워 계신 아버지는 멸치처럼 야위었다. 추수 끝난 논에 널부러져 있는 볏짚 같았다. 이쑤시개 같은 아버지 다리가 보였다. 온갖 장치가, 주삿바늘이, 이런저런 관이 전신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달린 게 하도 많아서 아버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양손을 꽁꽁 묶어 두었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것 같았다. 아버지는 꼼짝할 수 없어서 매우 힘들어하셨다. 묶인 손을 풀어달라고 애원을 하셨지만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사람을 알아보셨고 3일 동안 식사를 못했다고 큰아들한테 푸념하셨다. 틀니를 뺀 상태였고 몸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발음이 많이 샜지만 똑똑히 알아 들었다. 하여 이렇게 갑자기 가실 줄 몰랐다.


80년간 아버지를 지탱했던 세포 하나하나는 이미 죽음에 이르는 강을 건너는 중이었다. 마냥 힘들어하시는 아버지를 두고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를 면회한 다음 날 오후 2시경, 중환자실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져 호흡이 곤란하고 혈액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서 기도 삽관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4시간 꼬박 투석을 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이미 신장과 간이 상당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긴급 상황 발생 시 연명 치료를 할지말지 결정을 하고 동의서 몇 장에 서명했다. 우황청심원을 한 병 더 마시고 중환자실 입구에서 마른 입술을 핥으며 기다렸다. 약 30분이 흘렀고 아버지는 영영 눈을 감으셨다. 쌀 한 톨보다 가벼울 만큼 너무 빨리 가셨다.

바윗돌 같은 공허함이 염소처럼 내 가슴을 들이받았다. 어떤 감정이었는지 달리 묘사하기 어려웠다.


돌아가신 당일 운구차로 아버지를 고향 상주로 모셨다. 차병원에서는 은근히 자기네 장례식장에서 모시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타지에서 아버지를 보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급하게 병원 일을 정리하고 상주 장례식장에 오니 비로소 아버지 사망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장례 절차를 논의하고 부랴부랴 영정사진을 뽑고 부고를 돌리고 상복을 골랐다. 아내는 내 상복이 너무 크다고 퉁바리를 놨지만 내 모습은 중요하지 않았다. 빈소에 영정사진을 놓고 꽃으로 둘렀다.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웠다. 향이 너무 말랐는지 툭툭 부러지기 일쑤였다. 향이 부러질 때마다 짜증이 났지만 아버지 앞이라 참기로 했다.

성경을 펴서 아버지 앞에 놓았다. 지난 몇 년간 아버지가 교회에 다니셨고 세례까지 받았다는 것을 돌아가시던 날 알았다. 아빠가 되고 나서야 아버지 심정을 알게 되었지만 난 내 아들 아빠일 뿐이었고 아버지 아들은 아니었다.


아버지 영정을 보고 있으니 1994년 여름이 떠올랐다. 왜 그때가 기억에서 되살아났는지는 모르겠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공현진리, 내가 늦은 나이에 입대해서 신병교육을 마치고 퇴소하는 날이었다. 22사단 신병교육대 연병장에 아버지가 보였고 쌍둥이 동생과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뛰어가 아버지를 얼싸 끌어안았다. 핏줄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라서 달려가 안긴 것이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아버지를 그렇게 끌어안은 기억은 없다.

첫날, 빈소에서 쪽잠을 잤다.


이틀째, 손님이 많이 오셨다. 대부분 아버지 손님이었다. 휴가철에 날이 사납고 서울에서 멀어서 나는 부러 내 손님을 많이 초대하지 않았다.그런데도 부고가 돌고돌아 많은 분이 위로를 해주셨다. 동생 손님도 많이 오셨다.

어릴 적 고향에서 보고 자랐던 아저씨 아줌마가 어느덧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내가 벌써 오십이니 세월이 많이 지났음을 그분들을 보고 새삼 느꼈다. 그분들이 진심으로 위로해 주셨다. 상주처럼 슬퍼해 주셨다. 공감이라는 언어가 무엇을 정의하는지 깊이 느꼈다.

빈소를 찾은 손님과 이백 번 넘게 맞절을 하다 보니 무릎이 아팠다. 예상치 못한 고통이었다. 그래도 나는 정성을 다해 손님에게 절을 드렸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둘째 날, 우황청심원을 세 병은 마셨나 보다. 한 병을 더 마시고 빈소에서 쪽잠을 잤다.


아버지는 평소 수목장을 원하셨다. 나무와 함께 영원히 사시길 바라셨는지, 당신이 나무가 되어 그 자리 그렇게 서 계시길 원하셨는지 모르겠다. 장남인 내가 결정하면 될 일이었으나 여러 어른들과 상의해서 수목장으로 모셨다. 비석을 맞췄다. 나무처럼, 비석처럼 아버지가 영원하시길 빌었다.

마지막 날, 안식에 드셨다.


자연인 아버지에 대해 한 번이라도 진진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였다. 사람, 아버지로서 존중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엄마없이 평생 홀로 사신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걱정해 본 적 없다. 막냇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를 진지하게 위로해 준 적 없다. 내 감정이 우선이었고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평생 홀로 노를 저어 바다를 항해했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바다 위에서 고립되었던 분이다. 이윽고 찾은 섬에 발을 디뎠으나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말할 상대도, 말을 걸어 올 상대도 없었다. 자연인으로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여태 노인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오래 살아서 연륜과 지혜를 가진 분이 아닌 그저 꼰대에 불과한 분들이라고 폄하하며 살았다. 태극기부대를 보면서 그럼 마음은 더욱 굳어졌다.

상을 치르면서, 나보다 더 슬퍼하시는 고향 어른들을 보면서 내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백 년 가까운 삶이 그분들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내 백 년은 뭐가 다를까 생각해 봤다. 아무도 공감해 주지 않는 그들의 백 년. 사회에서 밀려나고 또래 주변인들이 하나둘 죽어갈 때 그들 마음엔 연탄 같은 먹구름이 돋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그냥 약한 존재일 뿐이다. 나 또한 머지않아 그렇게 되리라.

그분들은 그냥 슬펐기 때문에 슬퍼하셨던 것이다.


장례식장은 흑백이다. 단조롭고 명확하다. 가짜를 모두 뺀 진짜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색안경을 끼고 사람을 볼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 존재 그 자체로 보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공감이다.

시선을 조금만 돌려 그동안 애써 보려하지 않았던 것을, 미처 보지 못한 곳을 보며 살기로 했다.


이제는 내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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