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피아노 앞에 앉아도 늘 같은 곡만 고집해 치는 날들이 있다. 부모 입장에서는 “왜 새로운 건 안 해보지?”, “연습곡은 왜 안 치지?”라는 답답함이 먼저 올라오지만, 어느 날 문득 그 이유를 선명하게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아이가 좋아하는 곡만 골라 치는 건 단순한 ‘선호’가 아니라, 그 아이 마음이 가장 편안해지는 자기 보호의 방식이라는 것을.
어느 날 한 아이가 레슨 내내 한 곡만 반복해서 치길래 원리를 설명하며 다른 곡을 건너가 보려 했지만, 손끝이 유난히 굳고 표정이 금세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 결국 그 아이가 다시 좋아하는 곡으로 돌아왔을 때, 손이 부드럽게 풀리고 눈빛이 살아났다. 그 순간 느꼈다. 아이가 좋아하는 곡은 단순히 좋아하는 음악이 아니라, 마음이 쉬어가는 자리,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게 느껴지는 감정의 구역이라는 것을.
아이들은 아직 감정을 말로 풀어내는 힘이 부족하다. 그래서 음악이 마음의 ‘집’처럼 작동한다. 익숙한 곡은 실수할까 두려울 필요도 없고, 누가 보지 않아도 자신다운 표현을 할 수 있다. 심지어 하루의 감정이 고단한 날일수록 더 집요하게 같은 곡만 찾는 경우도 많다. 어른이 스트레스 받을 때 같은 노래만 반복 재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는 그 곡을 치며 마음의 숨을 고르고, 자기 속도로 에너지를 회복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아이는 좋아하는 곡에서 자기 효능감을 느낀다. “이건 내가 할 수 있어”라는 감각. 그 감각은 새로운 걸 시도할 힘의 뿌리가 된다. 좋아하는 곡을 여러 번 치면서 감정이 안정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곡에 도전할 여유가 생긴다. 결국 좋아하는 곡만 고집하는 시기가 지나고 나면 아이는 어느 순간, 스스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를 한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아이가 좋아하는 곡만 골라 치는 이유는 게으름도, 고집도 아니었다.
아이 마음이 자기 속도로 회복되고, 감정을 정돈하고, 자신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었음을.
어른이 해야 할 일은 이 시간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다음 문을 열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뿐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