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면을 그릴 때는 오직 연필만 사용하셔야 합니다.”
나긋하지만 한껏 단호한 교수님 말에 잠시 멍했던 것 같다. 21세기 첨단 시대에 나올 만한 과제가 맞는가 싶기도 했지만, 당장에 도구가 문제였다. 연필이야 문방구에서 산다고 한들 자취방에 연필깎이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오며 가며 독립서점 매대에서 눈여겨봤던 예쁘장한 연필깎이를 하나 떠올렸지만 얼마 안 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자 사는 집에 자주 쓰지 않는 물건은 덧짐이다. 나중에는 자리만 차지할 뿐, 애착이 들어 쉬이 버리지도 못할 게 분명하다. 어찌 됐든 도면 그리 는 데 쓸 두어 개 연필은 손으로 깎는 수밖에 없다.
문구용 커터칼로 어설프게 칼질을 하다 보면 연필심 머리는 뭉툭하게, 허리는 잘록하게 된다. 언젠가 과학책에서 보았던가. 사막의 모래바람에 밑동이 깎여 나가 머리만 커다랗게 남은 버섯 바위 모습이다. 조명 빛을 마구 반사하는 걸 보니 잘록하다는 허리도 반듯하게 깎이지만은 않은 듯하다.
본가에서는 서투른 칼질을 보다 못한 엄마가 연필을 손에서 뺏어갔다. 급한 마음에 나무 중간부터 칼을 대는 나와 달리, 엄마는 저 멀리서부터 차근히 밀고 내려 온다. 도색 밑에서 잠자던 연필 몸통은 그럴 때면 화들짝 놀라 헛숨을 들이킨다. 나무와 흑연이 진눈깨비로 뒤섞여 내린 신문지에다 연필을 몇 번 돌려가며 그으면 툽툽한 연필심은 그제야 번듯한 모양을 잡아간다.
“엄마 둬서 뭐 해. 연필 깎는 것 정도는 부탁해도 돼.”
아들내미 실력 무시하지 말라며 괜한 심술을 부리면서도 엄마의 것과 내 것을 번갈아 살핀다. 연필 두 개의 맵시가 이토록 다를 수 있을까. 그 차이의 출처가 연륜인지, 연필을 만져본 시간의 깊이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떻게 해야 잘 깎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거듭 쌓인 시간의 농도가 단면 하나에도 여실히 드러날 뿐이다. 내 쪽의 농도는 어쩐지 좀 투박하다.
서걱서걱. 우리말 단어는 양성 모음이 쓰였을 때보다 음성 모음이 쓰였을 때 더 센 느낌을 준다고 한다. 이를테면 ‘깡총깡총’ 뛰는 토끼와 ‘껑충껑충’ 뛰는 토끼의 차이쯤 되겠다. 그리 본다면 연필의 음성상징어는 아마 사각사각보다는 서걱서걱에 가까울 테다. 연필이 종이를 누르고 지나갈 때는 그렇듯 묵직한 맛이 있다.
쟁쟁한 잉크 펜 사이에서 연필이 가지는 매력은 적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지울 수 있다는 점이 크다. 의도치 않은 말 한마디가 곳곳에 오르내리는 첨단 시대에 연필로 쓴 글은 한 그루의 나무 쉼터가 된다. 이름만 봐도 설레는 사람 옆에다 사랑의 말을 끄적이기도 하고, 떠올리기 싫은 사람 이름 밑에다 욕 한번 갈겨도 본다. 벅벅. 재빨리 지우면 찰나의 감정이 하얀 고무 아래 밀리듯 뭉개진다. 하지만 역시, 연필의 소리는 서걱서걱이다. 지우개로 지워도 종이에는 연필 자국이 남는 것처럼 마음이 머금은 감정 또한 그냥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디선가 차곡히 쌓이는 말들, 미처 뱉지 못한 말들.
그러고 보면 스무 살이 되고 나서는 몽당연필을 쓴 기억이 없다. 죄다 난쟁이가 되기 전에 잃어버린 탓이다. 짤막해진 연필을 다 쓴 모나미 볼펜 껍데기에다 동여매고 곧잘 썼던 어린 날들이 분명히 있었는데 말이다. 한편, 볼펜을 다 쓴 날에는, 세게 그어도 자국만 남고 잉크가 나오지 않는 볼펜이 괜스레 자랑스러웠다. 잉크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애쓴 손목이, 짤따란 검지와 엄지와 중지가 더없이 갸륵했다. 그런 날에는 서랍 깊숙이 손을 넣어 새 볼펜을 꺼냈다.
정든 것과 새것. 끝을 보고 새로 시작하는 게, 본가 창문 너머의 은행나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프링을 달칵 누르면 머지않아 봄이다. 이다음 펜을 쓸 때는 내 마음도 한 뼘이나마 더 자라 있을까. 잎 나고 꽃 피고 노랗게 물들어가다 끝내 떨어지면 조금은 자라 있을까.
아쉽게도 은행나무는 고사하고 여기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원룸 건물은 창문을 열어놔도 볼 만한 게 별로 없다. 사람 지나가는 일도 드문드문하고, 차 소리마저 적막하다. 미세먼지나 들어올까 싶어 문을 닫았다가 금세 생각을 고쳐먹었다. 오랜만에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맞바람이 치도록 두었다. 아무래도 요즘 내 방의 농도가 퍽 짙다.
집에서 가족들이랑 살 때는 그다지 의식하지 못했는데, 나와서 살아보니 본가라는 공간은 확실히 부모님의 것이 맞는 듯싶다. 나는 그 집의 주인인 줄로 알고 지냈는데, 가만 보면 주인 눈에 들어 밥 잘 먹고 귀여움받는 일개 식객이었다. 집 명의가 누구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지와 관계없이 공간의 농도가 그랬다. 어떻게 하면 여기 이 공간에서 한 가정이 평온한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거듭 쌓인 시간의 농도는 무엇으로든 드러나는 법이다. 창문에 팔을 걸치고 뒤돌아본 전용면적 20제곱미터 원룸 방은 어쩐지 작고 투박함에도, 나의 색으로 가득 찬 것이 싫지는 않다.
마침내 공간과 친구 맺는 법을 배웠음에도 이것이 일시적인 관계라는 걸 안다. 반년만 지나면 월세 계약이 만료되어 별다른 사정이 없으면 나가야 한다. 여기 공간은 그대로 방치되거나 다른 이의 색으로 새롭게 채워질 것이다. 정들었던 장소를 삶에서 떼어낼 때는 아무래도 마음이 퍽 쓰라릴 테지만, ‘지금’ ‘이곳’의 공간과 시간을 충실히 맞이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지나간 삶에 후회가 없다는 건 다시 시간을 되돌려도 같은 곳, 같은 시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으리라는 예감, 그 모습이 최선이라는 확신이다.
어쩌면 지금이 나에게는 884번째 똑같은 삶일지도 모르겠다.
- <오늘도 한껏 무용하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