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한 뜨개실과 줄 없이 긴 대바늘을 나란히 놓아보면 제법 느낌이 산다. 한 층을 뜨개 용품으로 번듯이 채워 넣으니 인테리어 용도로 구매한 5층 조립식 선반도 얼추 자기 느낌을 찾아가는 듯하다.
계획에도 없던 자취를 시작한 건 대학 졸업이 일 년도 남지 않은 때였다. 냉장고 뒤적거려 남은 재료로 볶음밥을 해 먹고, 날이 적당한 날 빨래를 해 털어 널면 어른 흉내쯤은 될까. 나가 살면 숨만 쉬어도 돈이라지만, 한 집의 숨을 홀로 쉰다는 건 설렘이란 말이 따라붙는다.
제법 날씨가 풀린 겨울날, 자취하는 원룸에서 2백 걸음쯤 걸어 마카롱을 사왔다. 일정이 없어도 하루 한 번 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 건 우리 동네와 어색해지고 싶지 않다는 몸부림이다. 우리 동네, 내가 사는 마을, 혹은 근린. 자취방을 무심코 ‘우리 집’이라 하던 나를 보고 친구는 어쩐지 흐뭇해했다. 홀로서기를 갈망하며 지내던 모습을 오래 봐서일까. 어렸을 때부터 살던 집이 ‘본가’가 되고 자취방이 ‘우리 집’이 되는 일. 부모님의 안락한 품에서 정식으로 벗어나는 건 거기서부터다.
자기가 가지지 못한 부분이 커 보이는 게 사람이랬다. 사 남매가 한 지붕 아래 누워 자던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원하지 않았다면 외려 이상할 노릇이다. 지금이야 형 누나들이 하나둘 독립해서 나가 산다지만 사 남매가 함께하던 시절에는 ‘내 방’이라는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형과 함께 방을 썼던 시기에 간직할 만한 일은 많지 않다. 하나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두 사람이 잠자는 모양새다. 핸드폰을 손에 든 두 남자는 서로의 발을 상대방의 머리 쪽으로 향하고 엇갈리듯 누웠다. 하루 끝에 소소하게 허용된 시간을 형제에게 침범받고 싶지 않다는 의지였는지, 먼저 자는 이에게 액정 불빛을 비추지 않고자 하는 배려였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누구도 선뜻 제안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마치 원래부터 그렇게 하기로 한 듯 수행한 관습만이 어느덧 추억이란 이름으로 남았을 뿐이다.
아파트에서 살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어렸을 때 멋 모르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화폐의 가치가 불가피하 게 떨어지는 세상에 써내려간 불패의 신화, 공동구매의 원리로 양질의 관리 서비스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는 이점, 산이 국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 나라에서 아파트가 닭장이라 욕을 먹을지언정 미래 도시형 주택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현실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파트를 보금자리로 삼고싶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막연한 계획이기는 한데, 아파트를 구매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번다면(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만) 조금 외곽진 곳에서라도 집 지을 터를 하나 사고 싶다. 혼자 힘으로 손수 지으면 원주민 수준의 움막도 버거울 테니 건축사와 기술자는 고용할 생각이다. 마당이 딸린 벽돌집. 다만 꼭 빨간 벽돌일 것까지는 없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겠다는 순진한 생각을 놓지 못한 이유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일이 퍽 뒤설레는 일임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방은 내 삶의 결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조립식 선반을 4층으로 둘지 5층으로 둘지, 커튼을 못 없이 어떤 방식으로 달지, 조명 하나 사면서도 방 분위기에 어울릴지 고민하는 하루는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한 달 지출이 본가에 살던 때보다 배로 들고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은 일이 다수였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내가 발 딛고 사는 공간을 나다움으로 채우는 작업은 마음을 족히 벅차오르게 했다. 방 하나 꾸미는 일이 그럴진대 집의 토대부터 켜켜이 나로 채운다면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
공간(space)은 사람의 경험이 더해져 장소(place)가 된다. 발자국이 남은 거리, 기억을 품은 가게, 손때 묻은 전봇대. 마카롱 하나 사러 가는 길에도 인간은 공간을 채우고, 이용하며, 장소성을 입힌다. 그렇게 재구성된 장소는 다시 인간을 지탱한다. 공간을 장소, 즉 ‘우리 동네’로 짜 맞추는 일은 자기 존재의 복제 작업이다. 발걸음에 맞춰 눈도장을 찍는 몸부림은, 추억 속에서 들를 곳 하나 없는 삶은 왠지 좀 쓸쓸한 까닭이다.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가족. 아무 상관이 없던 낱말에 ‘우리’라는 관형어가 붙을 때 대상은 비로소 삶을 비집고 들어온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세상 만물에 ‘우리’라는 표찰을 붙이고 자기 것인 듯 여기며 살아간다. 떠날 때는 다 두고 가야 할지언정 표찰 하나 붙이는 행위는 가없이 숭고하다. 한없이 가볍고 허무한 세상에서 오직 그것만이 자기 삶에 무게를 더하기 때문이다.
궁금하다. 당신의 표찰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당신 삶의 무엇을 당신의 것으로 여기고 존재에 튀김옷 입히듯 묻혀 만물을 오롯이 느끼고 있는지 묻고 싶다. 뜨개질, 실타래처럼 가벼운 재료들이 일상에 입혀질 때 내 삶은 더는 가볍지 않다. 취미를 내 것이라 여기고 관계된 공간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 어쩌면 시간마저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 손수 만든 작품에 내 이름을 애써 새길 필요가 없는 까닭은 여기 들어간 일 분 일 초가 곧 나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도시학자인 앙리 르페브르 Henri Lefebvre는 도시를 이질적인 거주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일종의 ‘집합적 작품’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도시 거주자들이 자신들의 공동 작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시가 도시 거주민, 이용자들의 공동 작품이라면 우리 집, 내 방, 내 취미는 오롯이 나 한 사람의 작품이다. 삶의 무게는 이렇듯 표찰이 붙여진 작품을 얼마만큼 가치 있게 여기고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겠다.
아무튼, 내 마당 딸린 벽돌집의 집값이 떨어질까 하는 걱정은 모쪼록 참아주기를.
<오늘도 한껏 무용하게>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