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약속 없으면 나가지 않는다고, 소위 말하는 ‘집돌이’라고 어디 가서 소개하면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다. 여느 활달한 사람 못지않게 기운을 내뿜는 이가 그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아마 능청을 떠는 모습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딱 I네. 혼자 시간 보낼 때 에너지를 충전하고 사람들 만나면 쓰는 타입이거든. E는 그 반대고.”
MBTI에 한창 빠져 있는 친구는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명쾌히 진단을 내렸다. 사람 성격 유형을 16가지로 나눈다는 게 왠지 꺼림칙해 차일피일 검사를 미뤄 놓던 차였다. 뭐야, 무슨 배터리도 아니고. 그렇게 치면 밖에서 에너지 폭발하는 나는 고효율 리튬 전지쯤 되나?
나가서 사람 만나는 일이 꺼려진다기보다는 집 안에서 혼자 할 만한 일이 많은 쪽에 가깝다. 재미를 쉽게 느끼는 만큼 행복 더듬이가 민감한 편이랄까. 뜨개질, 독서, 드라마, 영화, 홈베이킹, 이따금 맛있는 요리까지. 간단히 집어 먹을 간식을 조금 만든 다음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넷플릭스로 영화 한 편 보면 그곳이 진정 낙원이다.
집돌이에게 없어서는 안 될 친구, 넷플릭스를 이용한 지는 좀 됐다. 뜨개질하면서 볼 만한 것쯤 하나 있었으면 하는 싱거운 바람은 큰누나의 프리미엄 계정에 마침 빈자리가 났다는 우연을 만나 꽃을 피웠다. 일 년 치 구독비는 간간이 조카들 놀러오면 돌보아 주는 것으로 셈했으니 뭐랄까, 이건 마치 무임승차다.
무제한 콘텐츠 서비스인 점을 생각하면 활용도는 낙제점에 가깝다. 원래도 영화를 틈내서 보러 가는 인간은 아닐 뿐더러 서사의 완급을 견디며 진득이 앉아 있는 성격도 못 되는지라 드라마 역시 가깝지 않다. 다만 시작의 힘은 무시 못 하는 게, 간간이 한두 편 보던 영화가 스무 편으로 늘었고 드라마 정주행을 다섯 작품이나 마쳤다.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고 자랑하기에는 민망할 일이지만 밀린 숙제를 끝낸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지도 앱에 표시해 놓은 맛집처럼, 언젠간 한번 꼭 봐야지 하고 미루어 놓던 드라마가 몇 개 있다. 김은숙 작가가 극본을 맡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목록에 있었는데 긴 여정의 끝을 최근에야 보았다. 총 스물 네 편의 대장정을 가는 동안 연두색 실로 냄비 받침을 하나 떴고 고무뜨기로 빨간 목도리가 둘 탄생했다. 끝까지 길을 걷게 해준 페이스메이커는 단언컨대 배우 들의 명품 연기이지만 드라마가 줄곧 던지는 메시지가 퍽 와닿았다.
“이건 내 역사고, 난 그리 선택했소.”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조선에서 태어나 미국인으로서 생을 보내며 끝끝내 이방인이었던 이의 말은 격동하던 시대에 던져진 존재의 선택을, 그 선택이 빚어내는 존재의 역사를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뜨개질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종종 생각한다. 한창 뜨개질에 빠져 있을 때는 아니고, 잠시 대바늘과 낯가리는 시간을 가질 때 그렇다. 멋진 사람이라 결론 짓기에는 남들 눈에 멋있어 보이는 모습을 바랐던 게 아닐까 싶고, 쓸모 있는 사람이라 믿기에는 한없이 무용한 몸짓이었다. 남자가 뜨개질하는 게 어때서, 뜨개질하며 살아도 괜찮다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면서도 점심때 든든히 채운 배가 저녁에 꺼지는 것처럼 곧잘 헛헛해졌다.
하여튼 바보 같은 생각. 배가 고프면 냉장고 문을 열어 뭐라도 꺼내 먹으면 될 일이다. 그렇듯 주문이 풀렸으면 잠자코 다시 걸어주면 된다. 나는 내 선택으로 나를 빚어간다. 나는 매 순간 뜨개질을 선택하는 중이다. 뜨개질의 시작이 스트레스에서 탈피하고자 했던 목적이었다면 지금까지 뜨개질을 지속하는 건 내가 밟고자 하는 길이 틀림없다. 나는 나를 실현하는 한에 있어서만 실존하고 그것은 내 본질이 어떠한가와 무관하다. 그저, 내 행동을 통해서만 정의될 뿐이다.
사물은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대바늘은 뜨개질에 사용되는 게 제 쓰임이고, ‘뜨개질용 바늘’이라는 쓰임새에 맞지 않는 대바늘은 대바늘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뜨개실이나 대바늘과 달리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뜨개실은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어도 뜨개질하는 나는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나는 순간순간 미래로 나를 내던지며 뜨개질이라는 행위를 선택하고, 행동하며, 책임짐으로써 존재 이유를 만들어갈 뿐이다.
그렇다면 질문, 뜨개질하며 살아도 괜찮을까?
일단 오늘은, 뜨개질하며 사는 게 내 존재 자체다. 그 안에 괜찮음의 잣대가 들어갈 틈은 없다.
- <오늘도 한껏 무용하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