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서에 적힌 건 아무것도 없더라

by 이성진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제 입으로 저런 소리를 하면 참 없어 보이긴 하지만, 낯선 자리에 갔을 때 자신을 알아봐 주고 대접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구분되는 형과 색으로, ‘저들’과는 다른 ‘누군가’로 기억될 수 있음은 퍽 고마운 일이다. 인지상정이라 할 만한 소망이 좌절될 때 그 기대치가 높은 사람일수록 섭섭함이나 분노를 크게 느끼겠지만, 정치인이나 소위 인플루언서와 달리 난 잘난 구석 하나 없는 사람이다. 나 같은 놈이 뭐라고.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여러 음역으로 짖는 소리가 귓불을 때리며 들어오는 걸 보면 발소리에도 고유의 지문이 있나 보다. 입구부터 들려오는 짖음은 아마 위협보다는 반가움, 혹은 일종의 그리움에 가깝다. 유전자에 각인되어 인간의 사랑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외침은 왜인지 쓸쓸한 감정을 태워 온다. 걸쇠로 잠근 철제 울타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해맑은 천사 아이들이 꼬리를 세차게 흔든다. 더러는 온몸을 던져가며 다리를 감싸 안는다. 나 같은 놈이 뭐라고.


“저리 버릴 거면 뭔 용기로 처음부터 키운다고 그러는 건지.” 전부터 한 번은 유기동물 보호소를 따라오고 싶었다는 친구의 말에 괜스레 숙연해졌다. 누군가의 무책임도 생선 뼈 발라 먹듯 달리 보면 버릴 구석 하나 없다. 세계를 살아감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순간순간의 선택이며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짊어지는 일이라는 자세, 이를 내 금과옥조로 삼고자 했던 날이 떠올랐다.


어릴 적 반려동물을 키우지 못하게 했던 부모님께 문득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사 남매만으로도 집이 미어터진다는 경고가 괜한 소리는 아니었겠지만, 책임지지 못할 일을 벌이는 습관을 경계하게끔 하려는 큰 뜻이 없지도 않았을 테다. 예나 지금이나 귀여운 것에는 사족을 못 쓰는 인간이지만, 한 명분 돈 쓰는 일도 버거운 마당에 가족을 늘릴 여유는 도무지 없음을 이제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안다. 사룟값이야 일정하게 나가는 지출이라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라도 났을 때 의료보험도 되지 않는 동물병원 문 앞에서 망설이는 비루함을 가족과 나눌 각오가 없다. 이 말이 누군가에겐 유기동물 봉사의 목적이 책임의 무게는 덜어내면서 행복은 느끼고 싶다는, 썩 모순적인 비겁함에 있다는 고백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후각은 쉽게 피로해져서 아무리 지독한 냄새를 맡더라도 오래 지속되진 않는다고 한다. 실로 축복과도 같은 능력이지만 여러 냄새가 섞여 제각기 존재감을 뿜는 곳에서는 그도 별 소용이 없다. 보호소에서 나는 향(?)을 몇 가지 나열해보자면 먼저 입구 문을 뚫고 나오는 강아지 특유의 체취가 있다. 다음으로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 시야에 들어오는 똥과 오줌을 보고 있노라면 한데 섞여 구분되지 못하던 분뇨의 냄새가 코점막을 찢고 올라온다. 봉사하러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동물들의 뒤처리를 하는 일인데, 한 바퀴 똥을 쓸며 오줌을 닦고 오면 다시금 흔적을 남겨놓는 천사 아이들이 퍽 밉곤 했다. 일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나는 마당에도 냄새는 흐릿해질 생각이 없어 보이니, 아마 개 냄새가 오줌 냄새를 덮고 똥 냄새가 다시 개 냄새를 덮는 방식으로 후각 세포를 가운데 두고 우르르 몰려와 정신없이 다구리를 놓는 게 아닌가 싶었다.


청소를 끝내고 사료와 물을 주고 나면 나 같은 초보는 더 할 게 없었다. 가서 애들이랑 놀아주면 된다는 소리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한두 평 남짓 되어 보이는 견사에 들어가기도 하고 마당을 뛰어노는 강아지들을 그러안고 마구 쓰다듬기도 한다. 처음 등장할 때만큼 반기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몸을 비벼오는 것이 그럴 때면 제법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다.


처음 보는 사람 무릎에도 냉큼 올라타는 녀석을 품에 안고 보호소 전경을 쓱 둘러 봤다. 초록의 철제 울타리 안에 자기 보금자리를 마련한 녀석, 귀가 일부 잘리거나 다리가 하나 없는 녀석, 습진이 크게 번진 발을 자꾸 핥는 녀석. 연민의 마음은 다른 환경에 처한 아이들과 비교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저 녀석들이 사랑으로 아껴주는 집에서 산책도 마음껏 하고 병도 제때 치료받으면서 자랐더라면 어땠을까. 분명 한때는 그랬을까. 한두 평 남짓한 공간을 제집처럼, 이따금 철문을 열어주면 볕이 잘 드는 마당을 자기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해맑게 뛰어다니는 걸 보고 있으면 나는 같이 웃으면서도 가슴 한끝이 먹먹하게 아려왔다.


사람이라고 제 처한 환경, 처지, 문화에 얼마간 매여있으니 본질로 따지자면 강아지와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살면서 자기 동네 밖을 벗어나 보지 못한 사람은 서울과 부산을 하룻밤에 오가는 이에게 한낱 울타리 속 존재에 지나지 않을 테다. 같은 원리로 세계 무대를 활보하는 이에게 내 모습은 고작 한두 평 되는 땅덩어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볕이 잘 드는 마당에서 해맑게 뛰어다니는 모양새겠다. 그렇다 한들 그네들이라고 뭐 초월자나 될까.


업힌 아이에게도 배울 점은 있으니, 만물을 스승 삼아 성장하는 삶이라면 퍽 멋지지 않은가.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찾아 숲이며 들판이며 방황하는 계절이 문을 두드리면, 나는 따뜻한 남쪽 나라 대신 여기 천사 아이들을 보러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함께 진득하게 뒹굴다 보면 자신을 오롯이 쏟아내며 하루를 충만히 사는 기쁨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녀석들은 그날의 웃음을 다음날로 미루는 법이 없으니까.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어디서 얻냐고, 누군가 물었던가.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당최 무슨 말인가 하니 연필은 쓰기 위해서 존재하고, 지우개는 지우기 위해 존재하지만,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길 인간은 그저 아무 목적 없이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 그럼에도 자신을 끊임없이 앞으로 내던져야만 하는 존재다. 그리 보면 우리가 아등바등 살아가는 데는 의미 있다 볼만한 구석이 하나 없지만, 반대로 어떤 의미든 제 마음껏 부여하며 살 수 있는 존재가 너와 내가 아닐까.


성인이 된 이후로 나와 알고 지낸 이들이라면 잘 믿어주지 않지만, 학창 시절엔 보수적 가치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곤 했다. 애국심과 종교가 양 날갯짓으로 하루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식이었다. 지겨운 야자 시간을 버틸 때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쓰일 훗날의 어느 날을 생각했고, 달콤한 일탈이 유혹할 때는 사후의 찾아올 천국의 영광을 천장의 굴비 쳐다보듯 견뎌냈다. 인생에 다시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던 때, 내 하루를 살아갈 힘은 그런 데서 나왔다.


봄을 수차례 보내면서 얼굴의 여드름 꽃이 우수수 떨어졌다. 군대를 가고, 여러 알바로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체코에서 교환학생을 하며 시야를 넓혔다. 나의 세계가 확장되면서 이제까지 감히 의심하지 않았던 삶의 정답들이 차츰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분법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을 해야 했던 인간은 그 가운데의 선택지, 심지어 선 바깥의 무언가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제까지 삶의 의미로 여겼던 대부분이 무너져 내린 바닥에 서서, 나는 무척이나 불안해했다. 말 자체로 형용모순이지만, 그건 기분 좋은 불안함이었다. 알을 깨지 않는 새는 날아갈 수 없고 허물을 벗지 않는 뱀은 몸집을 키울 수 없다. 내 삶의 의미라는 그릇은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채울 수 있는 것이었음을.


영화 「쿵푸팬더」에서 주인공 포가 열어본 쿵푸의 비급 용문서(dragon scroll)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네 삶의 의미를 한번 읊어보라면 일 년 뒤에도, 어쩌면 십 년 뒤에도 난 그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소리나 질펀하게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그럼, 삶의 의미를 찾아 나가는 과정은 덧없이 무용한가? 아니, 더없이 귀하고 찬란하다. 더는 하루를 ‘열심히’ 살고자 애쓰지 않는다. 유기동물 보호소에서 내가 배운 건 그런 게 아니다. 점심밥의 밥알을 입안에서 족히 굴리고, 길가의 꽃 하나에 잠시 시선을 멈추며, 우연스러운 상황이 선물처럼 들고 와준 인연을 보듬는 데 마음을 아끼지 않는 것. 과거에 매이지 않고, 미래에 끌려다니지 않고, 다만 오늘을 ‘충만히’ 살고자 한다. 내 하루를 살아갈 힘은 그런 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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