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 써서 챙겨 먹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5분을 채 넘기지 않아 폰을 내려놓았다. 엄마와의 통화는 늘 이런 식이다. 타지에 나와 사는 동안 일주일에 두어 번 남짓 통화하는 데도 그랬다. 본가에 가면 아들내미치고는 엄마와 밥상에서 나누는 말은 적지 않고 미주알고주알 늘여놓는 편이지만 이상하게 통화로는, 밥 잘 챙겨 먹었는지 부산에 있는 가족들은 별일 없는지 정도 너머의 말들은 잘 나오지 않았다. 다정함은 자취방에 챙겨올 수 없는 붙박이장이었을까.
돌아가신 부모님의 얼굴은 그려져도 목소리는 잘 떠올려지지 않더라는,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떠나간 이들을 기억에서조차 불러올 수 없는 일은 망각이 신의 축복이라 한들 씁쓸할 따름이다. 떠나감의 징후가 있어 미리 준비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나마 좀 낫겠지만 이별은 늘 그렇듯 불쑥, 대문을 형식상 두드리며 들이닥친다. 언제부턴가 스마트폰 녹음파일에 하나둘 엄마의 목소리가 쌓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기술이 좋아 터치 한 번 하는 수고만 들이면 후회와 자책의 짐을 약간이나마 덜 수 있는 시대에 내가 산다.
엄마의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이 늘어가는 걸 포착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눈가 주름이 골이 깊어지고 입가가 쭈글쭈글해지며 전체적으로 얼굴이 탄력을 잃어 중력으로 인해 밑으로 쳐지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노화를 감각하는 능력을 습득했다. 물론 마냥 기뻐할 일은 못 된다. 꺾여버린 생체 곡선의 꼭짓점을 찍고 내려왔다는 신호, 이제부터는 살아간다는 말보다 죽어간다는 표현이 어울릴 단계에 내가 진입하면서 자연스레 터득한 감각이니까. 더욱이 가까운 이들의 노화는 갱신의 주기가 짧은지라 새삼 눈에 와닿는 날엔 야속함이 배가 된다.
통화에서만큼은 안심하라고 둘러대는 말이지만, 의외로 신경 써서 챙겨 먹는다는 게 만만히 볼 일은 아니었다. 혼자 살면서 누가 챙겨주지 않으면 망가지기 쉬운 게 충분한 수면 시간, 청결한 방, 그리고 균형 잡힌 식습관이다. 되는대로 살아도 지장 없는 시기는 한철이라, 생체 시계의 부품이 하나둘 고장 나기 시작하면 건강에 대한 민감도가 늘어나기에 몸이 보내는 자그마한 신호에도 반응하게 된다. 이 나이쯤 먹으면 왠지 세상을 뒤흔들만한 거창한 고민들을 하며 멋지게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고작 한다는 게 저녁 뭐 먹지 따위라니. 퍽 위대한 삶이다.
잘 챙겨 먹기까진 못 해도 신경 써서 챙겨 먹기는 현실적인 타협점일 수 있다. 이를테면 헌혈을 하고 오는 길에 동네 야채가게에 들러 철분 보충을 위해 시금치 한 단 집어오기, 시금치에 있는 지용성 성분의 흡수를 생각해 참기름 듬뿍 넣어 무치기, 혈당 관리를 위해 이왕이면 흰 쌀밥보다는 잡곡밥으로, 또한 탄수화물은 가능한 마지막에 섭취하기 정도가 될까. 기껏 한다는 게 잘 먹고 잘 싸는 일이라니 누군가에겐 그저 허접해 보일 수 있지만 자기 몸을 아끼며 돌보는 존재의 미학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유서 깊게 내려온 관심사였다. 몸의 염증 반응이 남들보다 잘 나타나는 편이고 만성 염증이 특히 얼굴에 모낭염으로 곧잘 드러나는 나로서는 특정 음식이나 식이요법이 내게 잘 맞는 방법인지를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편이었다. 한때는 만성 모낭염이 죽고 싶을 만큼 원망스러웠지만, 이젠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내주어 사랑할 수 있게 됐다. 인간은 고통이 없을 때 평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고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말뿐인 힐링이 아니라 진정한 치유를 가능케 하는 ‘병’이다.
몸을 아껴주자는 차원에서 귀찮아했던 선크림도 꼬박꼬박 바르는 게 습관이 됐다. 노인에게 백발은 영광스러운 면류관이라는 말이 유명한 경구라지만, 노화를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닌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보는 주장이 힘을 얻는 시대엔 그에 맞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먼저 간 이들을 만나게 되는 날짜야 신에게 양보하겠다만 관짝에 기미 가득한 얼굴로 들어갈지 말지는 내가 정할 수 있게 해주시길.
그렇게 건강하게 챙겨 먹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선크림을 빼먹지 않고 바르면서 당최 무엇이 되려고 하느냐 묻는다면 얼떨떨할 따름이다. 장래희망을 늘어놓기에는 뻔뻔함을 잃어버렸고, 꿈을 늘어놓기엔 순진함을 잃어버렸으며, 밥 벌어 먹고사는 직업을 늘어놓기엔 낭만 내려놓는 법을 잃어버렸다. 모든 걸 잃어버린 내가 탄력 있는 몸과 뽀얀 피부를 가진들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열대 밀림의 시체꽃(Titan arum)도 7년을 벌어먹어 끝끝내 제 꽃을 피운다는데 이 짓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란 말인가.
“나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문문, <비행운> 中
원래는 김애란 작가의 동명 소설에서 따온 문장, 스물한 살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땐 미처 몰랐다. 나는 자라 겨우 내가 된다니! ‘겨우’라니!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에 지나지 않아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이 세계에서 나는 계속해서 무엇이 되어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온전히 같지 않다.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은 테세우스의 배처럼 순간순간 새롭게 교체되어 몇 년만 지나도 이전 세입자들은 죄다 방을 빼고 새로운 세입자들이 가득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느슨하게 연속성을 유지하며 변화의 과정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무엇인가 되기를 성공한 모습이 나의 본체가 될 수는 없다. 내 본체는 무엇인가가 되어가려고 바뀌고 탈바꿈해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가치의 창조는 파괴와 생성의 과정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니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느니, 나다운 삶이라느니, 자아실현이라는 게 애당초 끝을 볼 수 없는 유랑이다. 그 무한의 과업을 트월킹 춤을 추며 즐기는 자와 괴로운 멍에라고 생각하는 자의 차이가 있을 뿐.
나는 자라 내가 된다. 그대에게 이 말은 자조의 절규인가? 예찬의 찬가인가?
오늘 흔들 엉덩이를 내일로 미루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