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싱마스크 격자만큼의 세상

by 이성진

언젠가 집을 구하게 되면 확인해 볼 체크리스트에 국민체육센터와의 거리를 넣은 적이 있다. 본가에서 걸어갈 만한 곳에 있어 초등학생 때까지는 농구며 배드민턴이며 몸의 에너지를 쫙 빼고 들어갈 기회가 많았다. 가정의 평온을 위해서라도 네 남매의 막내는 얼마쯤은 방전된 채로 지내는 게 좋았다. 본가에 들른 겸, 오랜만에 가본 동네 국민체육센터는 자그마치 십 년이 넘은 세월이 무색하게도 일일 수영을 이천오백 원 받고 있었다. 역시 근본이 있달까.


열 살 때인가, 교회 수련회로 간 계곡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전날 비가 좀 내려 물이 불어 있었는데 허리까지 오는 수위에 뭔 일 있을까 싶었다. 좀 깊어지나 싶던 바닥은 훅 꺼져 들어가는 지점이 있었고, 팔다리를 휘저으며 허우적댔는데 발이 땅에 닿지 않으니 공포가 머리를 엄습했다. 식전기도를 열심히 해왔지만 주님과 이런 식으로 가까워지고 싶지는 않았는데. 주위에 또래 애들이 여럿 있었으나 다들 장난치는 줄만 알고 웃고만 있었다. 생각이 멍해지는 게 사고마저 서서히 물에 잠기는 듯했다. 그때 구원으로 내려온 삼촌뻘 교회 형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세상에 나올 일도 없었을 테다.


그때부터 엄마 아빠는 사람이 최소한 물에 뜨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멋지게 접영 평영은 못해도 개헤엄이라도 쳐서 발 안 닿는 물에서 살아는 남아야 하지 않겠니 성진아. 일리가 있었다. 애당초 수영 잘해서 손해 볼 일이 뭐 있겠는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수영을 해왔다면 지금쯤 500m든 1000m든 쭉쭉 나가는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국민체육센터에 등록하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줄 서서 등록할 정성이나, 안 그래도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고 등교 시간에 앞서 새벽반 수영을 하러 갈 성실함이 내게 있었다면 말이다.


맥주병인 채로 어른이 되어버린 지난 내 죄를 간간이 일일 수영으로 참회해도 여전히 물에 못 뜨는 건 변함 없었다. 유튜브에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몸을 쭉 펴고 힘을 빼라는데, 앞의 둘은 하더라도 힘을 빼기만 하면 외려 가라앉는 게 속 터지는 노릇이었다. 힘을 못 빼 내 몸을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곤란함은 잘해보고 싶은 일 앞에서 더욱이 괴롭게 느껴지는 법이다. 무엇보다 펜싱이 그랬다.


어느 스포츠야 마찬가지라지만 고수일수록 힘을 빼는 법을 배운다고 한다. 힘이 축 처진 채로 흐느적거린다기보다는 필요한 곳에만 딱 힘을 주고 불필요한 동작을 최소화하는 원리일 것이다. 칼끝의 포인트를 미세하게 조정하기 위해 온몸을 활용해야 하는 펜싱은 힘이 잔뜩 들어가 있으면 동작이 둔해지고 발이 무거워진다. 샤샤삭 발재간으로 거리를 재다가 결정적인 승부 타이밍에 몸을 총구에 화약 터지듯 쏘아내는 경지. 발펜싱이 목표였는데 어째 입펜싱만 늘었다.


어디 가서 취미로 하는 운동이 있냐고 물었을 때 펜싱이라고 답할 정도로 빠져 산 게 어느덧 두 해가 지났다. 깔짝깔짝 건드려 보기만 해 취미라기엔 민망한 운동이 한두 개가 아닌데, 얘만큼은 살렸다 해도 될 것 같았다. 유전 형질이나 민족의 문화도 그렇지만, 모든 살아남은 것들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바닥에 일자로 깔린 피스트 앞뒤로만 움직이는 일차원적 칼싸움이 뭐가 그리 좋아 나는 흠뻑 담그고 지냈던가. 어쩌면 펜싱이 살아남았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멈추지 않고 삶을 앞으로 나아간 게 펜싱 덕이었으니 한편으론 얘가 나를 살렸던 게 아니었을지.


교수님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될 때가 많지만, 대학원생은 제 연구 주제에만큼은 맹수가 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분석해 현상의 뼈와 살을 발라내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야 남들이 지금껏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연구의 의의를 사냥해낼 수가 있다. 대상을 뒤집어도 보고 뜯어도 보고 해체해서 다시 조립도 해봐야 하니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없이 뇌는 일을 했다. 밥 먹을 때도 샤워할 때도 머리 구석에 번뜩이는 아이디어 스파크 튈 자리 하나는 남겨놓아야 했다. 프로가 된 것 같아 초반엔 뿌듯했지만 이내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복잡함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서 일상과 공존할 수 있는 균형점을 확보해야 했는데 뭐든 처음이 그렇듯 나는 그게 참 여의치 않았다.


어느덧 연구 주제라는 사냥감 앞에서 산만한 인간이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 주제에서 파생된 정신의 흩뜨림은 일상을 미세침처럼 뚫어오며 하나둘 침범해 왔다. 순간을 오롯이 느끼겠다는 삶의 방향성에서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순간이라도 정신을 한 곳에 붙잡아둘 순 없을까. 어딘가 주의를 집중해서 논문 생각을 하지 않고도 소소한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시간을 환대할 순 없을까.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거지만 아마 펜싱이 나를 살린 건 이런 소망에 한 줄기 빛으로 나타났음이 클 테다.


온종일 연구실에 박혀 있다 펜싱을 하러 동아리방에 내려갈 때는 찌뿌둥한 몸이 엉켜있는 나무뿌리에서 뜯겨나가는 해방감이 있었다. 펜싱 양말과 펜싱화를 챙기고 강당 문을 열면 익숙한 신호음과 발 구르는 소리가 가슴을 두드리는 북처럼, 심폐를 소생시키는 손바닥처럼 얼굴의 혈색을 돌게 했다. 칼로 인사를 하고 펜싱마스크를 쓰면 암흑의 격자가 세상을 딱 그만큼으로만 좁혔다. 가슴팍을 향해 칼끝을 겨누고 있는 상대방을 빼고는 모든 것을 눈앞에서 앗아가는 그 묘한 긴장감을 나는 사랑했다. 게임이 끝나면 펜싱마스크를 벗고 인사하는 내 꼴은 땀과 허덕임으로 볼썽사나웠겠지만 환한 웃음으로 칼 인사를 전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뇌 구석구석이 물청소 되어 깨끗해지는 것처럼, 말끔해진 정신은 무엇이든 부딪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생존수단인 사냥 행위에서 잠시나마 거리두기. 슈퍼맨이 아니고서야 인생은 힘을 빼고서만 살 수도 없고 힘을 주고서만 살 수도 없다. 그 사이 어디선가 줄을 탈 수밖에 없는 게 운명이라면 마치 배우처럼 연기하듯 살아보는 건 어떨까. 자기최면이긴 하지만, 가끔은 이 모든 게 잘 짜인 하나의 연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매 순간 장면에 몰입하여 마치 감각으로 느껴지는 세계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루를 보내지만, 내가 인지하는 오늘은 어쩌면 누군가의 각본이라 해도 알 방도가 없다. 진하게 내린 커피를 입에 털어 넣으며 통계 데이터를 검토하거나 녹아내린 음지의 얼음을 보며 봄 내음을 한껏 느끼는 이 순간이 단막극의 장면이라 해서 기꺼이 받아내지 못할 이유도 없지만 말이다.


굳이 일상극의 배우를 자처하며 사는 것의 장점이 있느냐면, 배우는 극의 사건에 가장 몰입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누구보다도 현상에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의미 없이 흘러가는 하루에 진심을 쏟아내고, 격정이 치닫는 순간에 마치 ‘다 대본에 나와 있는’ 것처럼 관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삶의 문제를 너저분하게 늘어뜨리면서도 코어에 단단히 힘을 주고, 해답을 향해 폭발적으로 뻗어가면서도 우아한 궤적을 남기는 배우의 여유로움을 동경했다.


멋진 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하진 않는다. 다만 펜싱이며 연구 논문이 모두 대학원이라는 단막극을 이끌어가는 개연성의 장치이자 플롯이었던 것처럼 어떤 소품과 사건이 나를 계속해서 무엇인가로 되어가게는 할 것이다. 몰입했다가 느슨해지며 다시 집중할 만한 일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는 진다. 그저 그런 배우라도 살아는 진다. 바람이 분다면, 그걸로 됐다.

이전 07화오늘치 분량의 트월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