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쿠스코로 떠나자
Write & Photo by 거대 곰돌이
한국으로 돌아온 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뉴질랜드로 다시 돌아갈 마음이 간절했고, '곧 연락을 줄 것이다'라는 마지막 대화는 내 일상을 완전하게 멈춰 세웠다. 기다리는 사이에 여행이든 뭐든 하고 있다가 비자 신청 기회를 놓칠 수는 없기 때문에, 해외로 여행을 갈 수도, 단기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는 그런 일상이었다. 돌아와서 가족과 외식하고, 친구들 만나고, 그런 평범한 일상이 처음에는 좋았지만, 금방 한계가 왔고,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시간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비자를 기다리던 그룹이 두 그룹이 있었는데, 나를 포함한 패킹팀, 그리고 오프너 중에서 한국인 직원들이 또 여럿 있었다. 회사와 연락하는 두 그룹의 창구가 달랐는데, 패킹팀은 중간관리자와 연락을 했고, 오프너팀은 인원 중 한 명이 본사의 HR 직원과 직접 소통을 했다. 그렇지만 양쪽 모두에게 좋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패킹팀의 어린 외국인들의 일부는 워킹 홀리데이를 통해 호주행을 택하면서 대열에서 이탈했다. 이탈자가 발생한 게 내 기다림과는 사실 아무 상관은 없었지만, 어린 직원들이 자기 살 길 찾아 금방 결정하고 떠나는 것에서 나도 모르는 조바심과 같은 게 생겼다. 아마 그때부터 '혹시 못 갈 수도 있는 상황을 대비해야 되는가?'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기다린 지 대략 두어 달 때쯤 지난 시점에, 옛 여행업계 동료에게 소식을 하나 전해 들었다. 서로 잘 아는 중남미 전문 여행사에서 해외 파견 인력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그 회사는 페루의 쿠스코에서 한인 호스텔을 하나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총괄 매니저로 근무할 파견 인원을 뽑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외에서 계속 일을 해볼 생각이 있는 거면 거기도 한 번 연락해보라는 것이 동료의 조언이었다.
같이 일을 종종 했고, 그래서 잘 알고 있는 대표님과 회사였고, 이력서를 보내서 '나'를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는 회사라서 바로 연락을 해서 약속을 잡고 회사를 찾아갔다. 해외 파견에 대한 짧은 미팅. 그 미팅은 내 조바심을 해소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회사가 그리고 있던 '호스텔에 대한 비전'은 너무나 이상적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고, 특히 페루 쿠스코의 영업장 정상화를 완전하게 마무리한 뒤, 다른 국가로 이동해서 2호, 3호점을 준비한다는 계획이 괜찮았다. 언젠가 생각해봤던 '해외 숙소 + 여행사'운영에 대한 아이디어를 실제로 시도하고 있었던 부분이라 그 시도에 내가 들어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거기에, 30대의 전부를 걸고 열심히 쌓았던 여행사의 커리어를 다시 이어갈 수 있는데 주저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아마 뉴질랜드 재입국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에 흔들리고 있지 않았다면 대표님께 연락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짧은 미팅 후에 난 뉴질랜드행을 포기하고 페루행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이때가 확실하게 마지막일지도 모를 뉴질랜드 영주권 기회를 완전하게 걷어찬 당일이었다.
여담이지만, 페루행을 결정한 뒤에 바로 비자를 기다리던 팀원들과 함께 있던 페이스북 메신저의 채팅방에서 바로 빠져나왔는데, 나온 지 1~2주 안돼서 비자 지원 소식이 결정되었고, 기다리고 있던 모든 인원이 다 새롭게 비자를 받고 뉴질랜드로 출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비자를 받고 입국했던 인원들은 시기상 코로나로 인해 국경이 닫히기 거의 바로 직전에 입국을 한 것이었고, 그들이 입국한 뒤에 바로 국경은 폐쇄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코로나 폐쇄기간 동안 회사를 지키며 일을 했고, 장기간 외국인 노동자를 새롭게 수혈받지 못한 뉴질랜드는 코로나로 귀국을 못하고 있던 외국인 노동자들의 비자를 계속 연장해주다가, 노동력의 확보를 위해 2021년 말에 무려 165,000명에 달하는 비슷한 입장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까다로운 조건 없이 영주권을 부여하기로 결정을 했고, 나를 제외하고 막차로 입국해서 코로나 기간을 버텼던 동료들은 대부분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자격조건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1년도 안돼서 뉴질랜드를 떠나, 또 페루 쿠스코에서 다른 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도착해서 인수인계를 받고, 먼저 근무했던 매니저를 떠나보낸 뒤, 본격적으로 호스텔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처음 느꼈던 생각은 '설마 이 정도 손해를 보면서 여길 1년 가까이 유지를 하고 있어?'였다. 너무 손실이 컸고, 초반 투자라고 하기엔 운영도 너무 엉망으로 하고 있었다. 아마 내 돈으로 투자를 해서 운영했다면 문을 닫아도 10번은 더 닫았을 정도로 운영 성과가 엉망이었다.
숙소는 최대 25명 정도가 머물 수 있는 도미토리 숙소였고, 해외의 한인숙소는 조금만 소문나면 손님이 꾸준하게 찾아오게 마련인데, 인수인계받았던 숙소는 여러 가지 문제로 하루에 30%도 인원이 채워지지 않은 날들이 정말 많은 숙소였다.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한인 호스텔의 장점인 '한국인 안내자'가 상시 체류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내가 가기 전에는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원은 '전 매니저'가 유일했고, 내가 도착한 이후에는 '현 매니저'인 내가 유일했다.
이전 매니저는 그런 사업적인 책임감을 가질만한 사회경험과 나이가 아니라서 원활한 운영 대신에 개인의 사생활을 선택했고, 그에 따른 결과를 마이너스로 만들어냈다. 사장이 서울에 있으니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게 그 원인이었다. 나는 사생활 대신에 마이너스 운영을 개선하기 위해서 퇴근이 없는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전 매니저를 되돌려 보낸 뒤, 숙소에서 숙식하면서 스스로를 숙소의 '지박령'이라고 소개하며 손님을 응대하기 시작했다. 잠자는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24시간 중 볼 일 보러 나가는 1~2시간을 제외하고 대부분 숙소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하며 본격적인 '쿠스코 살이'가 시작되었다.
어떤 형태로든 해외 생활이 체질에 잘 맞는 건지, 힘들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생활이었다. 고산지대라서 움직이면서 숨 쉬는 일 자체가 힘들었지만, 항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즐거웠고, 그 사람들 속에서 항상 새로운 에피소드가 생기는 것도 소소한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다. 호스텔이고, 조리시설이 있고, 요리를 해서 먹는 것이 지내는 기간 동안 생활의 즐거움이고, 그래서 오가는 고객들과 같이 요리해서 식사하며 여행을 나누는 그 순간 하나하나가 참 소중한 순간이었다.
즐겁게 일을 했던 덕분인지, 초반 몇 주 동안 머물고 간 여행객분들이 입소문을 잘 내어주셨고, 어차피 한국인들은 대부분 다 같은 동선으로 여행을 하기 때문에, 입소문을 타고 손님은 모여들었고, 금방 영업실적은 반전을 줄 수 있었다. 다만, 워낙 마이너스가 컸던 구조라서, 매일 손해를 보던 상황을 매일 큰 수익을 얻는 상태로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매일 발생하는 손실을 계속 줄여나갈 수 있다는 것에 성취감이 들기도 했다.
영업실적이 개선이 된 이후에는 항상 기본으로 10~15명 정도는 손님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탈바꿈했다. 남미는 여행 정보와 '사람'이 참 중요한 요소인데, 쿠스코는 남미 여행의 본격적인 시작점 혹은 마무리 지점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였고, 사람이 많다는 소식은 더 많은 사람을 불러왔다. 여행시즌 중 성수기인 크리스마스, 연말, 연초와 같은 시기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리가 없다고 안내를 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숙소를 찾았다.
유일하게 개선이 안 되는 부분은 매니저인 나의 '매너리즘'이었다. 중남미 여행을 오는 이들은 부모/부부 동반의 여행이거나 대부분 나이가 나와 10살은 차이나는 젊은 층이 대부분이다. 손님들에게 나는 언제나 그냥 '비교적 젊은 사장님',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런 나도 그들의 여행의 방해꾼이 되지 않기 위해 사장님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인간적인 관계에서는 선을 지키는 영업을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풍요 속의 빈곤과 같은 외로움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숙소 운영자의 입장에서 서비스 마인드적인 부분 이외에 개인적인 '애정'을 손님에게 품으면 안 되기 때문에, 또한, 농담 삼아 '일하라고 보냈더니 연애를 하고 있네'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 선을 참 열심히 지켰는데, 그래도 매니저도 사람이라,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관심이 가거나 머물 당시만이라도 친해지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는데, '또래의 손님', '혼자 여행 오는 손님', '장기로 머물고 가는 손님'이 바로 그런 부류였다.
오래 머물고 있는 손님들은 숙소 밖에 나가지 않으면 대부분 나와 하루 종일 잡답을 하며 같이 밥을 해서 먹는다던지, 그런 일 이외에는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그렇게 친해지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블로그에서 '짝꿍'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여자 친구도 바로 그런 손님의 하나였다. 혼자 여행하는 여행객이었고, 또래였고, 일주일 가량 장기로 머물게 된 손님이었다. 거기에 원래 천천히 여행하는 스타일의 여행객이었고, 쿠스코 자체가 그냥 걸어 다니기만 해도 숨쉬기가 힘들어서 많은 활동을 할 수 없는 곳이라, 자연스럽게 숙소 안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밥을 해 먹으며,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한국에 같이 돌아와서 연애 초반에 여자 친구가 자주 물어봤고, 제대로 대답을 못했던 부분이기도 한데, 사실 어떤 계기로 호감이 생겼는지는 지금도 사실 잘 모르겠다.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들었던 것 같다. 한 달에 600여 명씩 새로운 손님을 만나고 있어서 누가 특별히 생각나고 그렇다기보다는 손님이 왔을 때 생겼던 하나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각이 나는 편이지, 사람 자체가 디테일하게 이렇다, 저렇다, 생각이 나는 편은 아니라, 그녀의 첫인상은 기억을 잘하질 못했다.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녀가 머무는 동안에 숙소를 벗어난 둘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했었다는 점이다. 브라질에서 살고 있는 또 다른 또래의 남자분이 합류해서 결국 다 같이 밥 먹으러 가는 일이 되었지만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하기도 했었고, 카페를 가자고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성실하게 감정을 표현했다. 숙소에 머무는 손님들에게 개인 연락처를 물어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그나마 물어보면 인스타그램 팔로우 정도였는데, 그녀가 떠날 때쯤에는 인스타그램이 아닌 개인 연락처를 물어봤었다. 그렇게 그녀와는 쿠스코에서 처음으로 사귄 '실제 친구'가 되었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해외에 오래 머물 계획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여행 후에 한국으로 돌아갈 사람이었기 때문에, 남녀 관계를 떠나서 개인 연락이 이어지더라도 이후에 다시 대면하지 않으면 금방 가졌던 호감 내지는 친근감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나중에는 그냥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 눌러주고 가끔 댓글을 달아주는 정도의 사이버 친구로 남을 가능성이 컸다. 이미 지난 아메리카 대륙 여행을 통해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서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이 친구로 계속 인연을 이어가는 게 참 어렵다는 것도 쉽게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가 머무는 중에 감정을 표현하고 연락을 하는 게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끝이 났을 수도 있었던 그녀와의 인연은, 현지의 상황이 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계속 이어지게 된다.
- EP4 FIN -
안녕하세요. 블로거 거대 곰돌이입니다.
이 브런치의 시리즈 '돈 없는 파이어족의 여행일기'는 코로나로 2020년 3월 미국에서 입국한 이후, 다시 해외로 떠날 예정인 2022년 12월 여행 글을 위한 인트로 성격의 글입니다. 본격적인 여행 글은 여행 출발이 임박해지는 시점에 본격화될 예정이고, 그 이전에 연재되는 글들은 제목처럼 파이어족으로 새롭게 살아보려고 시도 중인 블로거 거대 곰돌이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생업 블로거로의 도전을 시도하게 해 준 밑거름이 되어준 과거의 많은 여행 이야기들과 코로나 시절 이어간 국내여행은 지난 2년여 동안 제 블로그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의 블로그를 방문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