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운수 좋은 날. 모든 게 잘 맞았던 뉴질랜드 생활
Write & Photo by 거대 곰돌이
운수 좋은 날. 새롭게 시작한 뉴질랜드 생활은 기대 이상으로 시작이 참 좋았다.
뉴질랜드에서 생활하게 된 도시는 남섬의 북단에 자리 잡고 있는 블레넘 Blenhiem이라는 도시이다. 블레넘은 말보로 Marlborough 지역의 대표도시인데, 말보로는 와인 수출국인 뉴질랜드 전역의 수많은 와인 생산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이다. 말보로 지역을 굳이 표현하자면, 프랑스의 '보르도 와인'이 지역명과 함께 하는 그런 유명세가 있듯이, 뉴질랜드에는 '말보로 와인'이 가장 유명하다고 보면 된다.
블레넘은 말보로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그 와인산업 덕분에 1년 내내 와이너리 관련 일자리가 많은 지역이다. 많은 워킹 홀리데이 메이커들이 방문하는 지역이고, 그런 많은 유동인구 덕분에 도시도 많이 발전을 했고, 그래서 뉴질랜드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일자리, 생활비용, 생활 인프라 등 외지인이 와서 정착하기에도 불편함이 없는 도시이다. 나 역시 워킹 홀리데이 시절, 와이너리에서 일을 하며 3개월여 정도를 지냈던 곳이 바로 이 블레넘이었다.
이주가 목표였기에, 여행과는 다르게 생활의 안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런 점에서 익숙함은 굉장히 큰 무기가 될 수 있는데, 2019년 당시의 블레넘은 여행이나 출장 등으로 방문했던 전 세계의 모든 도시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오래 지냈던 도시였던 만큼, 금방 안정된 생활환경을 완성할 수 있었다.
입사한 기업은 뉴질랜드 최대의 농수산물 관련 기업 중 하나인데, 전국에 여러 지점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이다. 블레넘에 있는 공장도 그중 하나였다. 워킹 홀리데이 시절에 일했던 공장은 블레넘에 있는 지점은 아니었다. 같은 기업의 소속일 뿐, 전혀 다른 직장의 취직이었다.
블레넘의 공장은 취급하는 식자재가 많았는데, 내가 소속된 파트는 '홍합'이었다. 식자재를 가공&수출하는 기업인만큼, 수확, 가공, 포장 등의 기본 프로세스인데, 프로세스에는 많은 기계들이 투입되어 있고, 굉장히 많은 과정이 자동화되어 있는 반면에, 기계를 운영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기계로는 해결이 안 되는 과정들도 많았다. 사람의 인지 능력과 '사람 손'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는 말인데, 홍합은 특히 그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한 파트 중 하나였다.
워낙 나라 전체적으로 워킹 홀리데이 메이커들이 많아서 단기로 일하는 인력들은 언제든 충원할 수 있지만, 그들을 선배처럼 이끌고 가는 하는 중장기 근무자도 필요했는데, 내가 국내외로 취업을 준비하고 있을 딱 그 시기에 공장이 시설을 새로 들여오면서 확장을 하는 시점이 되었고, 그래서 운 좋게 중장기 근무자를 위한 여러 자리가 생겨 입사를 할 수 있었다. 중장기 근무자의 일자리는 사실 워킹 홀리데이로 일하는 직원들의 실력을 보고 회사에서 제안하는 게 대부분인 경우라서, 근무 평가 없이 바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홍합 파트에 입사를 하는 절대다수의 인력은 오프너 Opener인데, 이름 그대로 '홍합을 까는 사람'이다. 공장에서 취급하는 홍합은 우리가 한국에서 먹는 '끓이면 입을 벌리는', 그런 작은 홍합과 다르게 굉장히 큰 홍합이다. 정말 큰 건 손바닥만 한 크기이고, 먹는 알맹이 크기가 거의 전복만 한 것도 있다. 수출하는 제품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제품의 정식 호칭은 'Halfshell'이라고 해서 한쪽 껍질을 깐 홍합인데, 그렇게 한쪽 껍질을 까는 손질을 하는 역할을 오프너들이 한다.
손질된 홍합은 자동으로 비닐포장 처리가 되고, 박스 형태로 출고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을 패킹 Packing이라고 한다. 패킹을 하는 설비를 운영하는 포지션의 인력을 패커 Packer라고 불렀는데, 나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인력대행업체를 통해서 들어온 이들은 대부분 오프너로 배정을 받았고 나만 패커로 배정을 받았다. 과거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
오프너는 '하루에 홍합을 가장 많이 까는 사람'이 우수한 직원이다. 많이 까면 돈을 많이 버는 것이고, 많이 까면 대우받는 직원이다. 일할 때는 오프너들끼리 따로 소통을 하거나 하진 않고, 온전히 나와 홍합과의 싸움이다. 여담이지만, 그렇게 홍합을 취급하는 기업이 뉴질랜드에 여러 군데가 있는데, 관련 축제를 하는 날은 각 회사별로 홍합을 가장 빨리 까는 사람들이 대표로 모여서 홍합 까기 경연대회 같은 것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손재주가 좋아서 대표로 많이 출전하기도 했다.
반면에 패킹은 어느 정도는 포장되는 전체 공정에 대한 이해나 기기 작동법에 대한 원리를 알고 있어야 하고, 팀워크가 필요한 포지션이다. 노래도 들으며 말없이 일해도 되는 오프너에 비해서 소통이 훨씬 중요한 포지션이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일하고 있는 직원들 중에서는 업무 습득 능력이나 영어 소통이 괜찮았던 편이라, 일을 시작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담당했던 포지션에 대해서는 중간관리자의 보조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었다.
중간관리자들의 업무를 나눠서 하는 것은 장점이 있는데, 그런 과정에서 나도 중간 관리자로 키워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가장 큰 장점이다. 회사도 신 공장을 오픈하면서 패킹 팀이 좀 더 전문적이고 조직적으로 일을 하길 원했고, 모두가 중간 관리자급 숙련도를 갖추길 원했다. 그래서 많은 트레이닝 기회를 제공받았고, 그대로만 계속 근무할 수 있다면, 목표로 한 완전 이주를 위한 확실한 길이 금방 열렸을 것이다.
급여 부분도 생각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사실, 근무여건이 좋지는 않았다. 그날 마무리하지 않으면 폐사하는 생물의 특성상, 일의 마무리를 위해 오버타임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퇴근시간이 항상 고정적이진 않아서 완전히 스케줄링이 완성되어 있는 규칙적인 생활을 매일 할 순 없었다.
대신 한국처럼 연봉 총액을 계약하는 게 아니라 시급으로 급여가 계산되어 나오는 계약이라서, 초과되는 근무에 대해서는 무조건 금전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오프너들의 일이 끝나고 그들이 소화한 물량을 다 포장하고 청소까지 끝내야 패킹 파트도 일이 끝나서 통상적으로 오프너보다 적어도 1~2시간은 무조건 더 일을 했고, 그래서 급여적인 부분도 꽤 괜찮았다. 일이 많이 밀려서 1주일여 가량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하던 시기가 한두 번 있었는데, 그럴 때는 2주 정도만 일하면 한국에서 벌던 월급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해를 이어가면 숙련도를 올리면서 급여 등급도 올라가서 더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고, 그에 따른 동기부여도 확실히 되는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부모님 집에서 생활하면서 집세나 생활비를 아끼는 찬스는 얻을 수 없었지만, 원래 직장인 여행업계의 급여 자체가 연차에 비해서 워낙 박봉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급여생활자였던 순간과 비교해서 현지에서 노동 수입이 한국과 비교해서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세금을 한국보다 많이 떼서 그렇지, 세전 급여 수준을 비교해보면, 절대적인 액수는 오히려 한국보다 훨씬 높았다. 생활비로 큰돈이 지출되지만 한국에서의 수입과 비교해서도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다.
새벽, 혹은 늦은 오후에 출근해서 정해진 시간만큼 일하고, 돌아와서 마트에서 장을 보고, 저녁에 고기 구워서 와인 한 잔에 밥 먹고, 쉬면서 TV, 유튜브 보고, 다음날 도시락 준비하고, 그렇게 주중을 반복하다가 주말에 쉬고...... 그런 게 평범한 일주일의 루틴이었다. 반복적인 일상이 지루할 수도 있지만, 또한, 휴가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것도 내게는 좋은 점이었다.
홍합은 크게 9~10월쯤에 시즌이 시작해서 7~8월에 시즌이 종료되고 중간에 홍합 양식 등을 이유로 휴식기를 갖게 되는데, 8~9월의 긴 휴식기 이외에 국가적인 연휴 등으로 1년에 일주일 이상 쉴 수 있는 휴가기간을 두어 번 만들 수 있었다.
먼저, 연말연초는 짧으면 1~2주, 길면 2~3주를 쉬는 뉴질랜드의 전통적인 휴가기간인데, 크리스마스이브, 크리스마스에 박싱데이(12월 27일), 1월 1일~2일이 또 공휴일이고, 주말까지 더하면 적어도 일주일은 기본으로 쉬는 날이 있기 때문에, 뉴질랜드의 많은 기업들은 이때쯤 아예 회사 문을 닫고 쉬는 경우가 많다.
공장도 이 기간에 휴무를 했고, 비록 그 이후에 입사를 해서 긴 휴가기간을 누리진 못했지만, 다음 해를 생각한다면 눈치 없이 길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그 기간이 참 기다려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4월은 부활절 기간과 우리나라로 치면 현충일인 안작데이 Anzac Day가 있어서 부활절과 안작데이가 겹치는 경우에 따라서 일주일 가량을 쉴 수 있는 찬스를 만들 수 있는데, 이때도 회사에서 다 같이 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줘서 같이 사는 동료들과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렇게 한 번씩 휴가를 다녀와주면, 일상 근무의 스케줄이 불규칙적이라도 충분히 감내하고 일을 할 수 있다.
운수 좋은 날. 모든 게 잘 맞아떨어졌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비자 VISA'에서 큰 문제가 발생했다.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7월 31일까지 근무를 하는 것으로 근로계약서를 썼다. 계약서 상에 명시된 정확한 계약의 명칭은 '2018-2019년 홍합 시즌'에 대한 계약이고, 앞서 언급했듯이 홍합은 시즌을 넘기는 기간에 긴 휴식기가 있다. 그 휴식기를 고려해서 계약을 7월 31일로 한 것이고, 그 계약 자체는 문제가 있는 계약이 아닌 합당한 계약이었다.
이민성에서 워크 비자를 발급할 때, 기간에 대해서는 그런 계약서를 바탕으로 비자 기간을 설정하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이들은 대부분 7월 31일까지 뉴질랜드에 체류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만 특이하게 1달을 더 받아서 8월 31일까지 체류할 수 있었다. 어찌 됐든 그 안에 비자를 갱신하거나 뉴질랜드 밖으로 나가야 했다.
비자 만료일이 다가왔고, 회사는 계약 갱신을 위한 인원을 선별했다. 당연히 다음 시즌에도 일할 인력에 선별이 되었고, 계약서를 새로 쓸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관련된 서류 작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정말 운도 없게 뉴질랜드에서 몇 년 만에 이민성의 워크 비자 관련 규정을 크게 손을 본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회사가 서포트하며 비자를 내어줄 수 있는 인원수가 정해져 있는데 더 중요한 인력의 연장을 위해 그 TO는 다 소진을 해서 우리가 입사하면서 받았던 것과 다른 카테고리의 비자는 받을 수 없었고, 같은 카테고리의 비자를 다시 신청했어야 했는데, 그게 계속 보류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뉴질랜드의 행정력을 고려했을 때, 같은 비자로 있던 직원들은 7월 말 혹은 8월 말에 모두 뉴질랜드를 떠나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계약서를 갱신하고, 비자 수속에 들어가면 기존 비자가 만료가 되더라도 일은 못할지언정, 체류는 하고 있을 수 있는데, 수속 자체를 못하면 불법체류자가 되는 순간인 것이었다.
시즌은 6월 중순부터 슬슬 끝이 나기 시작해서 7월 초중순쯤에 완전히 마감이 되는 스케줄로 진행이 되고 있었고, 시즌이 완전히 끝나는 시점부터 8월 31일까지 버텨보다가 그때도 소식이 없으면 뉴질랜드를 떠날지, 아니면 일 없이 버티는 생활비를 고려해서 미리 떠날지를 고민하게 된 시점까지 왔는데, 결국 뉴질랜드를 최대한 빨리 떠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이득이라고 판단을 했고, 빠르게 정리를 하고 한국에서 대기를 하겠다고 회사에 통보를 하고 한국행을 선택하게 되었다.
몇 년은 돌아오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출국했지만, 결국, 비자에 밀려서 8~9개월 만에 한국으로 복귀, 1년도 안돼서 또다시 기약 없는 '무직자'가 되었다. 그렇게 난 다시 한국생활로 복귀를 했다.
-EP3 FIN-
안녕하세요. 블로거 거대 곰돌이입니다.
이 브런치의 시리즈 '돈 없는 파이어족의 여행일기'는 코로나로 2020년 3월 미국에서 입국한 이후, 다시 해외로 떠날 예정인 2022년 12월 여행 글을 위한 인트로 성격의 글입니다. 본격적인 여행 글은 여행 출발이 임박해지는 시점에 본격화될 예정이고, 그 이전에 연재되는 글들은 제목처럼 파이어족으로 새롭게 살아보려고 시도 중인 블로거 거대 곰돌이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생업 블로거로의 도전을 시도하게 해 준 밑거름이 되어준 과거의 많은 여행 이야기들과 코로나 시절 이어간 국내여행은 지난 2년여 동안 제 블로그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의 블로그를 방문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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