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무것도 안 해서 더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Terre Di Mario Red

by HERMITAGE
Terre Di Mario Red

불을 꺼야만 잠들 수 있는 줄 알았다.


暗轉(암전)


들어오자마자 급하게 스마트 전구에 불을 붙인다. 한동안 와이파이 기반 제품을 쓰면서 고생했었는데, 1달여간의 분쟁 끝에 환불 처리하고 더 비싸고 묵직한 블루투스 기반의 단단한 P 전구로 바꿨다. 프리셋은 휴식으로, 아니다 이렇게 어둡게 했다간 책 한 글자가 아니라 기대자마자 잠이 들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눈을 뜰 땐 분명 돌아와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딴짓 말고 그대로 눈을 붙이리라 다짐했건만 막상 돌아온 집에선 딴짓이 하고 싶다. 씻고 나면 노곤해질까 싶어 캔들에 불을 붙인다. 육백 그람이 넘는 긴 놈을 몇 개나 태워 버렸나. 벌써 세 통 짼데, 얼마간은 초록색에 꽂혀서 비슷한 향을 돌려가며 태웠다.


예전엔 그래도 아무거나 태우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는데 이제는 심지에서 타닥타닥 소리 나는 것만 골라 태워 공기 중에 날려버린다. 파라벤인지 뭔지 알게 뭔가 지금 이 공간의 온기가 좋다. 조명도 켰고, 캔들도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줄어들기 시작했다면 이제 물을 받을 차례다.



녹이는 재미가 있는 영국 친환경 브랜드 제품을 매일 쓸 수 없어 컬리에서 통에 넣어 담아 보관할 수 있는 가루 입욕제를 샀다. 아낀다고 아꼈는데 몇 번 쓰고 보니 바닥이 보였다. 바닥은 통이랑 같은 색이었다. 맹물이라도 상관없다. 하루 종일 얼얼하게 두들겨 맞은 몸을 녹이는데 체온보다 뜨거운 물이면 족하다. 피로가 풀리는 대신 그와 비슷한 시늉을 한다. 바나나 대신 향을 넣은 뚱뚱한 우유 같다. 욕조에 걸터앉아 흐르는 물을 맞는다. 지금쯤이면 혈액순환이 빨라져 다른 생각이 나기 시작한다.


손을 뻗어 닿는 곳에 수건을 깔 수 있다면 그 위에 유튜브를 켠다. 무슨 소리라도 필요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땐 허전하다. ‘서마터 폰’ 중독이라 해도 부정할 수 없다. 딱히 콘텐츠에 귀를 기울이는 건 아니지만 고요함이 싫다. 어릴 때부터 아무도 없는 집에 TV를 켜놓고 있던 습관처럼 이젠 스마트폰 화면에 불을 붙인다.


걸터앉아 있다 보면 반은 욕조 안으로 나머지 절반은 배수구로 흘러간다. 물이 차오르는 시간이 더디다. 겉만 보면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빨리 씻고 잘 마른 보송한 상태로 기대앉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천천히 가능한 꾸물거린다. 하루 중에 지금만큼이라도 더 느리게 움직이고 싶다. 가능한 지금 보다 더.


샤워가 길어진다고 재촉할 사람은 없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으니 더 느리게 움직이고 싶어졌다. 차오르는 물에 샴푸와 포마드가 범벅이 된다. 물을 흘려보낸다고 했는데 하루 종일 버텨주던 머리 위로 먼지와 뒤섞인 제품이 녹아 읍소한다. 이젠 보내줄 때다. 물을 빼기 시작한다. 괴상한 굉음을 내며 블랙 홀로 빨려 들어간다.



머리를 말리다 보니 조명이 생각보다 밝다. 씻기 전보다 컨디션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와인을 한 잔만 했으면 좋겠다. 더도 말고 딱 한 잔 만. 와인을 오래 쟁여두질 못한다. 샐러도 없지만 다람쥐가 도토리를 숨겨놓듯 보관하는 공간엔 언제 채웠냐는 듯이 밑 빠진 것처럼 사라진다. 보드랍고 뽀글이라고 불리는 옷을 걸치고 맨발인 채로 문을 나선다. 집 근처 세븐일레븐에서 해결을 해야 한다.


이 시간엔 딱히 연 곳도 없다. 매일 똑같은 [디아블로]는 지겹고 [몬테스 알파]는 물린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 무슨 ‘와인 투정’이겠냐마는 같은 곳에서 마주하는 리스트는 매번 그놈이 그놈이다. 어차피 지금처럼 피로에 몽롱할 땐 그 맛이 그 맛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평소보다 가벼운 걸 골라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이탈리아가 눈에 들어온다. 시간이 별로 없다. 1분의 고민 없이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VIVINO : 3.6


Hermitage

@big_be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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