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인간

프롤로그

by HERMITAGE

어쩌다 보니 매일 술을, 와인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하루 중 유일하게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은 지친 일상에서 돌아와 밀린 끼니를 욱여넣고 반쯤 회복된 컨디션을 다시 내일을 맞이해 준비할 수 있도록 충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에너지의 원천은 술, 그중에서도 마실 때마다 다른 맛과 인상을, 시간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남길 수 있는 와인이었습니다. 매일 같은 음식만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심혈을 기울여 고른 와인을 각각의 요일별로 구성해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예로부터 애주가, 즉 주당들에게는 매일 몸에 주류를 보충해야 하는데 그 이유를 註釋(주석)처럼 달아 놓곤 했는데 일요일 저녁부터 월요병에 시달렸던 월요일 밤의 경우 평일의 시작인 날로서 가장 일상에 몰입하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온 직후이기 때문에 보다 파워풀하고 강렬한 인상의 와인을 떠올리게 됩니다. 입이 가장 쓴 날이기 때문입니다. 화요일은 그렇게 부스스 눈을 뜨고 정신없이 지나가는 날로 월요일보다는 조금 힘이 빠져있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저녁 메뉴는 여전히 무거운 것으로, 어쩐지 무거운 메뉴에는 묵직한 레드와인을 곁들이고 싶습니다. 그렇게 수요일입니다. 일주일의 절반에 와있습니다.


숨 고르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힘을 조금 더 빼고 내일에 부담 없는 와인을 떠올립니다. 아직 목요일이 남아있어서입니다. 목요일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내일 하루만 더 하면 주말을 맞이할 수 있다는 희망 말입니다. 목요일엔 그래서 좀 경쾌하거나 동기부여를 도와줄 산뜻함, 가벼운 인상의 와인이 떠오릅니다. 금요일, 이제 다 왔습니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마셔도 좋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것, 오랫동안 고심해서 골라왔던 취향에 가장 가까운 것을 천천히 음미해도 좋은 가장 기분 좋은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금요일은 앞으로 세 번의 주말(금, 토, 일)그러니까 휴일의 시간 중 가장 마음이 편한 날로,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력 하나만큼은 가장 강한 때입니다. 이럴 땐 월요일보다도 묵직하게 때론 얼큰하게 취할 수 있는 그런 와인을 골라 와인과 物我一體(물아일체)가 되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포도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토요일은 금요일의 숙취가 아직은 아련하게 남아있습니다. 와인은 다른 주종에 비해 숙취가 강한 편이라, 반드시 와인으로 숙취를 해결해야 합니다. 술에는 술로, 왜 해장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금요일의 강한 정신력을 이어받아 오늘까지는 가장 좋아하고, 또 한 방의 임팩트가 있는 와인을 고릅니다. 아쉽지만 일요일이 되었습니다. 낮에는 괜찮지만 저녁이 되어 해가 뉘엿뉘엿해지면 오늘이 지나고 평일을 보내야 또 주말이 온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내일 묵직한 것을 찾으려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좀 부담스럽니다. 매일 마시는 물 대신, 칼로리만 차지하는 탄산음료 대신 음식에 소화를 도울 가벼운 와인을 고릅니다. 벌써 일주일이 다 지났습니다.


매일에는 매번 새로운 와인을 고를 이유가 생깁니다.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노곤해진 몸에 적색에, 때로는 황금빛의 반쯤 투명한 액체를 몸 안으로 흘려보내고 나면 알 수 없는 에너지가 피를 타고 생겨나는 것을 느낍니다. 대단한 와인이 아닌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고 집어 들었을 때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의 라인업이지만 매일을 함께 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세상엔 좋은 와인이 너무 많지만 오늘을 같이 할 수 있는 와인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가성비가 최고라거나 이게 정답이라기보다는 와인과 함께 했던 그때 그 순간에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포도로 만든 가장 완벽한 음료와 매일을 함께하며 꼭꼭 눌러 담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Hermitage

@big_be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