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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Aug 17. 2023

중년소년의 잠깐 트레블로그

3. Paris  

헤이그에서 밤버스를 타고 8시간을 달려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유럽의 도시들을 거점으로 여행할 때 밤버스는 숙박비를 줄이며 이동도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옵션이지만 8~9시간을 이동하는 동안 제대로 누울 수도 없고 불편하게 잠을 자야해서 다음날 컨디션은 최악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불편함을 감수할 의사가 있다면 밤버스는 여행을 좀 더 압축적으로 저렴하게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좋은 선택지다. 

보통 좌석이 좁지는 않지만 뒤로 젖힐 수 없는 버스가 많아서 불편하다. 

그렇게 밤새 달려 도착한 파리의 아침날씨는 우중충하고 쌀쌀했다. 앞으로 거의 매일 아침 하나씩은 먹게 될 크로와상 하나와 커피 한잔을 시켜 마시니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었다. 나에게 이번 여행의 주목적은 순례길을 걷는 것 이기 때문에 난 파리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하지 않았었다. 이틀정도 머물면서 유명한 관광지 중심으로 돌아다니면 되겠지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내가 파리에서 묵었던 숙소는 파리의 대학가인 Gentilly 메트로역과 매우 가까운 Jo&Joe라는 호스텔이었다. 이 호스텔의 독특하고 맘에 들었던 것은 비교적 싼값에 나무로 만들어진 독립형 캐빈을 쓸 수 있다는 점이다. 나무로 사방을 막고 위아래층 칸을 나눠 2명이 하나의 캐빈을 분리해서 쓸 수 있게 만든 이 캐빈은 나름 아늑했고 편리했다. 

독특한 나무캐빈 (층간소음은 어쩔 수 없다.)

이 호스텔의 또 하나의 장점이자 단점이랄 수도 있는 것은 호스텔에서 운영하는 식당과 펍이 꽤나 맛집인 데다 금요일 저녁만 되면 1층에서 열리는 공연때문에 동네사람들이나 대학생들로 북적댔다는 것이다. 정말 맛있게 먹었던 햄버거와 감자튀김, 그리고 다양한 에일맥주를 판매하고 있으니 파리에 머물며 자유분방한 파리 대학생 분위기에 젖어보고 싶다면 한번 묵어보길 추천하는 숙소다. 제주에도 이와 비슷한 콘셉트를 추구하며 운영하는 꽤나 큰 호텔이 성산에 있는데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까지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역시 관광객과 현지인, 무엇보다도 대학생들이 주로 찾는 공간이라는 점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숙소에 체크인을 마치고 나는 별생각 없이 에펠타워를 보기 위해 나섰다. 날씨가 더 흐려지더니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전철역을 나와 조금 걸으니 바로 눈에 들어오는 에펠타워는 역시나 랜드마크 다웠다. 처음에 이걸 짓는데 파리사람들이 그렇게 반대했다고 하던데 용도가 불분명(?) 한 이 정도 규모의 건축물을 짓는데 누가 어떤 기획안을 내놓아도 좋은 소리만 듣기는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은 여전했지만 조금씩 잦아드는 비 때문에 나는 센강변을 좀 더 걸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컨디션은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라는 영화에서 느꼈던 파리의 정취를 조금이라도 느껴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유럽 대도시 어딘가를 혼자 배회하고 있다는 느낌에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어 대전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6학년 조카에게 에펠타워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줬더니 기껏 돌아온 답변은 '오'가 전부였다. 나름 열과 성을 다해 조카바보로써 살아온 십몇년간의 세월이 조금 허무해지는 순간이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렇게 너도 나도 나이를 먹어가는 거겠지. 숙소로 돌아가는 전철역 인근에 엄청난 규모의 유골들이 묻혀있는 카타콤이 있어서 잠시 둘러볼까 싶어 발걸음을 옮겼다. 끝도 없이 길게 선 줄 뒤에 기다리고 있으니 예약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오늘 볼 수가 없다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었다. 파리 대부분의 관광지는 워낙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에 미리 홈페이지나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예약을 하지 않으면 현장에서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이곳도 그렇게 운영되는 곳 중의 하나였다. 뭐 어쩔 수 있나. 이렇게 된 이상 빨리 숙소에 돌아가 내일 일정을 결정하고 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파리의 첫째 날이 흘렀다. 


아침부터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어제보다는 가성비 좋은 일정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상당한 가성비의 노예라서 이런 먼 곳까지 나와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못 견뎌하는 사람이다. 아니. 돌이켜보면 쉬는 것 자체를 잘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어젯밤 숙소에서 결정한 일정은 오전에 노트르담 대성당을 둘러보고 루브르박물관 구경을 가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호스텔에서 나와 전철을 타고 처음 들른 곳은 노트르담 대성당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 입구가 막혀있고 공사 중이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공사현장 앞에 놓인 안내글을 보니 노트르담대성당 화재사건 때문에 복원공사가 한창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을 아주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무지함이라니.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난 큰 사건이었는데도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뉴스를 흘려보냈던 것이다. 안내문을 읽다 보니 숭례문 화재사건이 떠올라 씁쓸해졌다. 숭례문 화재사건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일종의 부끄러움이었다. 한 시민의 무분별하고 정신 나간 행동을 제때 제지하지 못해 벌어진 인재로 국보 1호가 하룻밤에 불타 없어지는 것이 한국의 오늘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의 원인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전기결함일 수도 있고 담배꽁초가 원인이라고도 하는데 어찌 됐건 인재로 벌어진 일로 추정하고 있는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토록 오랫동안 정성 들여 만들어 놓은 것을 그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이 모든 것이 실수였던 것처럼  파괴할 힘이 있다. 우리는 그런 약한 존재들이니까.

2024 파리올림픽에 맞춰 복원완료 하는 게 목표라는데 얼렁뚱땅 마무리하지 않았으면. 

   

샐쭉해진 기분을 달래며 루브르박물관을 향해 센강을 걸었다. 날씨 운이 없어서 한결 더 우중충한 암회색의 파리를 보며 조금 가라앉은 기분으로 걷고 있었는데 퐁네프다리를 건너니 한 건물에 설치된 거대한 설치미술이 눈에 확 들어왔다. 파리 루이뷔통 본점 사무실 건물을 활용해 만든 홍보용 설치미술작품으로 보였는데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시의 콘셉트가 너무나 선명하게 전달되어 시원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맘에 들었다. 날씨 덕분이었으려나. 역시 유럽의 문화수도 답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에 남는 장면 중에 하나로 꼽을 만한 곳이었다. 똑똑한 브랜드 마케팅이자 대담한 작품선정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나의 파리여행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을 정도로 내 마음에 쏙 들었던 설치미술이었다. 

그런데 저 여자분은 누굴까? 루이뷔통 대표 디자이너 중 한 명 같기는 한데..

한참을 더 걸으니 위풍당당한 거대한 루브르박물관 건물을 만날 수 있었다. 역시나 수많은 관광객과 길게 늘어선 줄. 거대한 유리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아무런 사전조사 없이 파리에 왔기 때문에 루브르박물관이 유리 피라미드 건물을 통해 지하로 들어가는 구조로 되어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입구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박물관 지하로 내려가니 강남의 코엑스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지하실내 규모에 압도감을 느꼈다. 오디오로 해설을 들을 수 있는 티켓도 있었는데 하루종일 둘러볼 시간도 부족할 텐데 오디오를 들을 시간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선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물관을 둘러보다 보니 잘못된 선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수많은 역사유적과 예술작품이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 같았다. 차라리 하나라도 제대로 보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하고 있다. 루브르박물관의 수많은 전시물 중 나의 마음을 가장 끈 것은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언어로 쓰인 점토 태블릿들 이였다. 내가 알기로는 농작물 등의 물물교환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다가 언어가 발전하면서 구전되던 이야기들을 적어놓기도 했다고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런 유적들을 눈앞에서 보는 건 참 놀라운 일이었다. 기록의 힘이란. 그리고 흙의 힘이란 놀랍다. 몇천 년 전의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점토판에 글을 새기고 나는 지금 흙에서 추출한 것들로 만든 반도체의 힘을 빌어 인터넷에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지금 반도체를 활용해 인터넷에 남기는 기록도 그 당시 그들이 남기고자 했던 목적과 크게 달라진 것도 별로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외에도 루브르박물관에는 끝도 없이 역사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어떤 건물을 받치고 있었을 소장식을 한 기둥까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조금 화가 났다. 이렇게까지 했어야 됐나 싶은 마음. 

승자들의 역사는 또 다른 역사의 승자에게 파괴되고 약탈당한다. 인간역사의 굴레. 루브르박물관은 나에게 그런 역사의 굴레를 확증시켜 주는 인증소 같은 곳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 유적들이 자리하고 있던 지역 사람이 이것을 바라보면 어떤 심정일까?

루브르박물관은 오랫동안 프랑스 왕들이 사용하던 정궁이었다. 전시된 그림 중에 프랑스와 왕들과 신하들이 수많은 그림으로 가득 채워진 거대한 방에서 모임을 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 있는데 그 그림을 보면 권력이 자석처럼 끌어모으는 수많은 물건들과 그것을 잠깐 누리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꽤나 엄숙하게 그려져 있다. 가능한 모든 멋진 것들을 잔뜩 모아둔 루브르박물관을 나와 또 비를 추적추적 맞으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머리를 빙빙 도는 생각.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사라지고 또 기억될까?

인생도 권력도 시간 앞에선 허무해진다. 아..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도 아재로구나. 


순례길을 걷기 위해서 프랑스의 바욘이라는 도시로 내려가 생장피에드포흐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하는데 하필이면 내가 파리에 도착하는 그 주부터 기차노조가 파업을 시작하는 바람에 바욘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타려면 예정했던 일정보다 하루 더 파리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노조의 연금문제 때문이라는데 유럽이나 한국이나 연금문제로 골치 아픈 건 매한가지인 듯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날씨가 계속 안 좋아서 참 아쉬움이 많았다. 유명한 거리나 공원에서 한가로이 야외활동을 즐기고 싶었지만 언제 비가 올지 모를 날씨 때문에 미술관, 박물관 외엔 마땅한 관광코스를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날은 나의 SNS 지인들이 강력추천한 오르셰미술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원래는 기차역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지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천장은 볕이 잘 드는 통유리로 되어있고 플랫폼으로 사용했을 법한 긴 복도를 중심으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미술관 관람을 하다 보면 동선이 엉망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오르셰 미술관은 그럴 걱정이 전혀 없는 곳이다. 길게 뻗은 통로에 연결된 전시실 하나하나 돌다 보면 한 작품도 빠짐없이 충실하게 감상할 수 있는 편리한 공간 구조가 참 마음에 들었다. 

인상파 화가들의 낙원이라 불리는 오르셰미술관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단연코 밀레의 것들이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매체에서 보던 그의 그림이 왜 나에게 깊은 인상을 그리 남겼는지 모르겠다.  밀레의 작품들의 고요하고 소박한 느낌들이 참 좋다. 당시에 너무나도 흔했던 삶의 장면에서 왠지 모를 신성 한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뭘까? 고흐의 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책을 참 좋아한다.  특히 고흐가 밀레의 작품을 동경하며 그의 예술적 시선과 사상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대목을 읽으며 인상파 화가들이 자신들의 예술적 시선을 확립하는 것에 당시 밀레와 같은 독창적인 화가가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을지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밀레의 작품 외에도 고흐, 고갱, 모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5층 전시실도 좋았다. 하지만 반 고흐의 작품들을 보다 더 내실 있게 보고 싶다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꼭 가보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반 고흐의 작품 중 내가 좋아하는 후기작들이 많은 곳이라서 반 고흐 팬이라면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 아닌가 싶다. 

밀레 '양치는 소녀와 양 떼'

이밖에도 로댕과 카미유의 조각들, 지금 봐도 너무나 세련되고 섬세하게 가공된 19세기의 가구장인들의 작품도 볼만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미술관에서 감성 충만한 몇 시간을 보내고 밖을 나서니 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센강 너머 파리북역까지 좀 더 걷고 보고 싶은 곳이 많았는데 너무 아쉬웠다. 파리의 거리 구석구석 직접 발로 걸어보며 도시를 더 가깝게 체험하고 싶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꼭 한번 다시 오고 싶은 도시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마음이 들었다. 



#파리 #루브르박물관 #오르셰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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