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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Aug 25. 2023

중년소년의 잠깐 트레블로그

10. Belorado -  Burgos

순례길 DAY 11. Belorado - Atapuerca


벨로라드엔 다양한 벽화들이 많이 그려져 있다.

순례길의 시작점인 생장 델 피에드 포흐에서 같은 날에 출발한 동료 그룹이 대략 40명 정도 되는 것 같다. 그중 한국사람만 5명이니 일행 중 10% 이상이 한국인이다. 동쪽의 작은 나라에서 이 길을 걷겠다고 오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것에 유럽인들은 신기해한다.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라 연령대도 다양하고, 혼자 걸으러 온 사람부터 가족여행에 이르기까지 순례길을 함께 찾은 여행 구성원도 다양했다. 동료나 알베르게 주인, 식당주인 같은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한국인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이유를 물어보곤 했다. 나는 목표가 확실한 낭만적 도전을 비교적 저렴하고 안전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라고 답했다. 아름다운 자연과 도시를 지나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하는 모험을 한국사람들이 순례길 이외에 어디에서 즐길 수 있을까? 등산과 트레킹을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의 특성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한국사람들이 유달리 모험을 즐기는 민족인지는 모르겠지만, 엎어지면 코 닿는 크기의 섬 같은 나라에서 잠시 벗어나 스페인이라는 광활한 땅을 한 달 이상 걸으며 이베리아 반도를 횡단하는 해방감을 즐기는 것이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자면 '경쟁적이고 치열한 삶의 굴레를 벗어나 목표가 분명한 장기간의 도전을 하루하루 해나가는 낭만적 일상을 즐기는 것.'


'스페인 하숙'이라는 TV 예능프로그램도 순례길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데 엄청나게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순례길은 이곳을 걸어야 하는 이유와 목표가 분명한 사람들이 꽤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해야 하는, 그야말로 쉽게 엄두를 낼 수 있는 여행이 아니기에 대중적 인지도와 별개로 한국사람들의 순례길 사랑은 유별난 구석이 있기는 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제주도의 올레길을 걷다 보면 마주치는 올레꾼들의 수는 매우 적었다. 유명한 오름이나 관광지 사이에 놓인 길을 제외하면 하루에 마주치는 올레꾼은 열명 남짓 정도였을까? 일일평균 3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제주도에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극소수 인걸 생각하면 먼 타지에 있는 순례길에 한국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이 신기하다. 

1000여 년이 넘는 순례길과 불과 20여 년이 조금 지난 올레길을 단순 비교하는 건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서로 어떻게 다른지 감각적 차원에서 이야기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순례길, 특히 프랑스길에서 느끼는 주된 감각적 경험은 A에서 B로 대부분 곧은길을 나아가는 단순하면서 명확한 직진성이었다. 동에서 서로 나아가는 확실하고 단순함이 주는 안정감도 있다. 오래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지나온 길이여서도 그렇고, 고원지대를 지나야 하는 지리적 특성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올레길이 가진 상대적인 장점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길과 집을 잇는 골목이라는 뜻의 올레라는 제주어에서도 수 있듯이 올레길은 주로 해안가에 자리 잡고 있는 제주도의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옛길을 따라 걷게 되어있다. 바다 검은 바위길을 지나면 어느새 오름 곶자왈(숲)을 만나게 되고 숲을 지나면 다시 마을 하나를 지나게 되는 식이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은 앞에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는지 예상하기 어려워 마치 신비로운 여성의 속살 위를 걷는 느낌이다. 순례길이 순한 인상과 굳은 심지를 가진 남자의 모습이라면 올레길은 속내를 없고 변화무쌍한 여자의 모습 같다고 할까. 걸으면서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이내 제주의 숲과 바다냄새가 그리워졌다. 제주로 돌아가면 올레길에 대한 향수로 또 길을 나서게 되겠지. 그 길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면 좋겠다. 올레길은 멋진 길이다. 

올레길 14-1 코스

순례길 DAY 12.  Atapuerca - Burgos

우리는 어느덧 약 300km 이상을 걸어왔으며 순례길에서 만나는 두 번째 도시 부르고스를 향하고 있었다. 부르고스에서 순례길에서 친해진 몇몇 동료들과의 작별이 예정되어 있었다. 순례길을 두 번째 걷고 있는 한국인 사진작가 선배님과 순례길 첫날부터 빵을 함께 나눠먹었던 멕시코 친구 아나벨라 그리고 부르고스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이태리 친구 크리스토퍼 이렇게 3명은 순례길을 멈추거나 잠시 다른 곳을 들렸다 다시 복귀할 예정이었다. 이밖에도 벌써 많은 사람들이 부상이나 개인일정으로 중도에 포기하거나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특히 아나벨라는 순례길 첫날부터 신발에 문제가 있었고 급기야 무릎까지 안 좋아지는 바람에 부르고스 까지 오는데도 꽤나 고생을 했다. 친해진 순례길 동료 몇 명과 함께 아나벨라와 크리스토퍼의 작별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는 알베르게가 아닌 좀 더 편한 숙소에서 묵기로 했다. 친한동료끼리 맛있는 저녁식사와 와인파티를 즐길 작정이었다. 부르고스에 도착한 우리는 숙소에서 짐을 풀고 크리스토퍼의 안내를 받으며 부르고스 대학 캠퍼스를 구경했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순례길을 걷다 보면 부르고스 대학에 도착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대학교가 쓰고 있는 오래된 건물은 유서 깊은 왕립병원이고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대학교로 설립된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학교 건축물들은 부르고스 성당만큼이나 오래된 역사적 건물이라고 했다. 우리는 학교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엔트리와 메인메뉴에 맥주 한잔까지 해서 7유로씩 지불했다. 너무나도 싼 가격에 놀랬고 맛도 괜찮았다. 오래된 건축물을 대학교 캠퍼스로 활용해 도시를 대표하는 새로운 상징으로 변모시키는 방법이 보기 좋았다. 이 캠퍼스를 오가며 철학이나 문학공부를 한다면 공부할 맛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르고스 대학교 입구

크리스토퍼는 우리를 부르고스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뷰포인트로 안내했다. 부르고스 대성당 뒤편의 작은 언덕을 올라가면 부르고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곳이었다. 부르고스를 지나는 순례자들은 꼭 한번 들러서 기념사진도 하나 남기면 좋을 것 같다.  

부르고스 뷰 맛집

우리는 언덕을 내려와 부르고스 대성당 내부를 구경했다. 종교 건축물 구경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유명한 성당이다 보니 그냥 지나치기엔 좀 아까웠다. 13세기에 착공해 16세기 그러니깐 장장 300년이 넘게 건축된 이 성당은 고딕건축물의 조형예술이 집약된 거대한 예술작품 같았다. 내 짧은 지식으로 고딕양식의 특징을 뭐라고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은 첨탑의 거룩한 위용과 복잡하고 정교한 건물 내외부 장식 같은 것이 특히 눈에 띄었다. 작은 문 하나에도, 시선이 잘 가지 않는 기둥에도 성경의 스토리가 녹아 있는 장인의 조각들이 새겨져있었다. 이 건축물은 그 당시 사람들이 상상하는 천국에 입성하는 관문을 형상화 한것이라 해도 좋을것 같았다.  

대성당 실내를 들어가면 내부조각과 제단의 웅장함과 섬세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이 성당공사에 매달려 왔을지 짐작이 된다. 성당 건축이 한창이던 당시 부르고스 시민 대다수가 몇 세대에 걸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돌을 지고 날라 깎고 다듬는 단순 노동에서부터 고도로 숙련된 장인의 실내 장식에 이르기까지 이 엄청난 대공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과 인력이 투입되었을지 생각해 보면 그 지극한 정성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영원한 천국이라는 내세의 삶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자신의 한평생을 바쳐가며 이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신과 내세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인 나에게 이 대성당이 주는 예술적 감동은 천국을 땅 위에 건설하기 위해 스스로 신화적 존재가 된 건축가와 예술인들의 지독한 열망이었다. 그리고 생명의 유한함을 뛰어넘기 위해 어떻게든 노력하는 인간에게 느껴지는 일종의 측은함이었다. 


부르고스의 밤은 너무나 즐거웠다. 우리는 샐러드를 만들고 닭을 굽고, 또르띠야 데 파타타를 곁들여 먹었다. 작별하는 친구들과 함께 살사댄스를 추고 깔깔거리며 늦은 밤까지 와인을 마셨다. 몇몇 친구들은 흥이 올라 클럽으로 향했고 이 무리의 최연장자인 나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누웠다. 친동생 같던 미소천사 아나벨라는 내일 버스를 타고 바르셀로나로 떠난다. 친절하고 섬세한 매력의 크리스토퍼는 학교로 돌아간다. 나머지는 다시 아침부터 걷기 시작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메마른 땅인 메세타 고원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하루하루가 아쉬워지는 날들이 곧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보고 싶은 페페, 크리스토퍼, 아나벨라, 프레데리케, 마르코


#순례길 #부르고스 #Burgos #산티아고 #트레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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