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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 순간
우리는 존엄할 수 있을까

영화 <스틸 앨리스>

1만 조각으로 이루어진 배를 하루 한 조각씩 교체해 왔다면, 1만 일 뒤에 그 배는 과연 이전과 같은 배라고 할 수 있을까.


뇌와 기억은 그대로 두고 나머지 육체를 모두 바꾼다면, 우리는 과연 그대로의 나 자신일까, 아닐까.


"삶은 기억의 총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 환자는, 과연 생의 마지막 순간 존엄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나 자신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앨리스는 언어학의 대가이다. 그녀는 삶에 있어 부족함이 없다. 

사랑하는 가족. 의사인 남편과 그 뒤를 잇는 아들, 변호사인 그녀의 첫째 딸까지.

연극배우 둘째 딸이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는 게 아픈 손가락이지만, 그녀는 충분히 행복하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발성 알츠하이머는 그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그랬던 그녀가, 평생의 업으로 살아온 "언어"를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가족성 조발성 알츠하이머 치매. 

강연에서 어휘를 잊고, 강의 시작 전에 주제를 잊고, 글 한 줄을 읽고 나면 다음 줄에 가서 내용을 잊는다. 그렇게 스스로를 잃어간다.

영화 초반 조깅하던 광장에서 기억을 잃고 혼돈에 빠지는 줄리안 무어의 표정연기는, 어떤 "경지"이다. 보는 사람까지 같이 주저앉게 만든다.

알츠하이머 치매의 특징은 "역행성 기억상실(retrograde amnesia)"과 함께 인지기능의 저하이다.

그녀는 최근의 기억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수준의 지식들부터 하나씩 잃어가기 시작한다.


기본적인 대소변도 조절하기 어려운 날이 찾아오고, 누군가 항상 지켜봐 주지 않으면 생활 자체가 어려운 상태로 가게 된다.


딸의 이름도 까먹고, 항상 만들던 푸딩의 계란 숫자도 까먹는다.

핸드폰에 기억할 것들을 저장해 두어도 한계가 있다.


결국 그녀는, 존엄성을 잃느니 죽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장되어있는 노트북 영상에 따라 그것을 시행하려 한다. 

누군가 와서 막아주었으면 하는 마음과, 이대로 앨리스의 뜻대로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충돌한다. 오죽하면...

하지만,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죽어야지"라는 의지조차 까먹어 버리게 된다.

그녀에게 스스로의 삶을 포기할 기회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삶은 흘러가며, 슬픔 속에서도 기쁜 일은 찾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오롯이 기뻐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삶은 흘러가며, 슬픔 속에서도 기쁜 일은 찾아온다.

첫째 딸의 출산, 너무나도 예쁜 손녀의 출생.

이 모든 기쁨의 순간 속에서 그녀는 오롯이 기뻐하기 힘들다.


첫째 딸이 유전적으로 조발성 알츠하이머 양성 소견이 나온다. 발병률은 100%. 

아마도 앨리스와 비슷한 나이에, 똑같은 증상이 찾아올 것이다. 

대를 이은 불행. 이를 어찌 하나. 


스스로도 감내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녀는 가족들에게 미안해하기까지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 마지막 여행. 그녀의 남편은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바쁜 사람이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남편은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결국 앞으로의 생 역시 중요한 사람이다.


언제나 자랑스러웠던 의사인 남편과 아들, 변호사인 첫째 딸은, 결국 각자의 일과 각자의 사정으로 그녀의 곁에 남아있지 못한다. 


"3년 병수발에 효자 없다."는 말은 특히나 치매에 절실히 와닿는 표현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조차도 항상 그녀 옆에만 있을 수는 없다.


마지막 순간, 그녀의 곁에 머물러 주는 건 둘째 딸이다.

결국 늘 아픈 손가락이었던 연극배우인 둘째 딸만이 일을 접고 그녀 곁에 머문다.

가장 좋은 돌봄의 자세, 곁에 머물러 주는 것.


이제 그녀는 초점을 잃고, 총명함도 잃는다. 

자신의 어머니와 언니에 대한 머나먼 과거의 기억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초점을 잃고, 총명함을 잃고. 남는 것은 과거의 기억. 언니와 엄마와 행복했던 먼 과거의 기억.


평생에 걸쳐 연구한 언어. 


수십만 가지의 어휘들이 그녀에게서 사라지고. 항상 멍하니 밖을 응시하는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단어는 

"Love." 


인생은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음을 마지막 시퀀스에서 절절하게 뿜어낸다. 

과거의 가족에게. 현재의 가족에게. 곁에 남아준 딸에게.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어떤 모습일까. 


기억은 과연 그 인간 그 자체인 걸까. 

기억과 지성을 잃은 인간은 존엄할 수 있을까. 


Still Alice. 


결국 남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해 주어야 한다.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지혜로웠던 그녀의 모습을.

아프고 힘든 그 모습조차도, 여전히 그녀는 사랑스러운 앨리스 임을 우리가 기억해 준다면, 

생의 마지막 순간 길을 잃더라도 우리가 곁에 있어준다면,

그녀도, 우리도 끝까지 존엄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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