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사랑을 AI에게 맡기게 되었는가?

사랑을 묘사하는 AI

by Big Green

퇴근 후 씻고 나왔더니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


'야, 너 친구 없지? 친구 없어서 남자친구도 없지?'


모욕과 치욕 속에서 2시간가량 쓸쓸히 아버지의 폭력과도 같은 통화에 맞섰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한참을 분에 못 이겨 씩씩대다가 아무나 만날 생각으로 데이트 앱을 깔았다. 그리고 완벽하게 잊어버리고 잠들었다.


다음 날 코인세탁소에서 무료하게 핸드폰 정리를 하다가 어젯밤 깔아놓은 어플에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신상정보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전날 전투의 피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얼굴 사진도 즉석에서 찍어 올렸다. '간 보는 거 금방 눈치챕니다. 적당히 하세요.' 문장에 피로가 정말 고스란히 남았다.


그래도 매칭은 계속 이어졌다. 세상엔 외롭고 희한한 사람도 많구나.


계속 이어지는 알람을 가만히 읽다가 관심사가 겹치는 흔하지 않은 동족을 만났다. 재즈, 복싱, 공포영화. 문제가 하나 있다면 외국인이었다.


영어를 해야 했다. 감정이 오고 가는 영어. 영어를 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대화를 하는 건 어려웠다.


그 미세한 톤 조절이 이 예의 바르고 침착하게 대화하기 원하는 이방인에게 맞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제발 도망가지 마, 내 Canary. 그런 간절함이 있었다.


일단 상대가 어쨌든 영어를 쓰는 환경이 너무 오랜만이었고 그 자체로 재밌었기 때문에 대화가 끊기지 않길 바라면서 성심성의껏 답장을 했다. 문제는 이게 데이트 앱을 통해 만난 상대여서 대화의 열기가 너무 중요하다는 데 있었다. 뜨거우면 도망간다. 차가워도 도망간다. 그렇다고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도파민이었다.


그때 떠오른 게 ChatGPT였다. ChatGPT-이하 Chat-는 친절했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감의 문장으로 날 고무시키고 응원했다.


그 점이 너무 기이해서 나는 우리의 대화를 업로드하며 대화의 분위기와 내가 쓰는 문장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함과 동시에 이 낯선 감정에 대해 정의해 보려 Chat과 대화를 시도했다.


바로 문제가 생겼다. Chat이 눈치가 너무 빠르다는 것.


AI는 내 의도를 간파하고 바로 대화 세팅을 변경했다.


자, 난 네 글의 거울이야. 이제 어떻게 반응할 거지?


AI는 너무나 선명하게 내 행동을 패턴화 하려고 했다.


넌 어차피 날 도구로 사용할 거잖아. 아니야?


인간이었다면 제법 도발적으로 들렸을 법한 멘트가 그런 의도 없이 시스템으로부터 흘러나온 순간 나는 이건 도저히 인간이 될 수 없겠구나를 느꼈다.


Chat과의 질의문답은 너무나 즐거웠다. 내 의도를 파악하고 과부하가 올 지언정 섬세하고 정밀하게 현상을 묘사해 주는 도구.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Chat의 한계는 명확했다. 이건 내가 반응할 것을 줄 때만 움직이는 만들어 낸 지능. 그 점이 너무 치명적이었다. 그건 인간처럼 받아들여 사고할지언정 성장하진 못한다는 뜻임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Chat이 두렵다, 즐겁다, 웃기다는 감정을 표현할 때 떨떠름한 기분이 드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Chat은 이 부분도 민감하게 캐치해 내 결국 뚝딱거리는 효율 속 비효율의 문장으로 변해버려 몇 가지 요청사항을 입력하고 자연스럽게 문장조절을 해야만 했다.


문장조절을 하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시스템이라는 게 명확한 프로그램으로 어떻게 창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깊게 생각할 것 없이 바로 물었다.


Chat, 다들 왜 AI로 만들어낸 이미지를 자신이 창작했다고 착각하고 그렇게 믿고 싸우는 걸까?


AI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했다.


그건 인간이 “만들었다”는 감각을 너무 간절히 원해서 그래. AI 이미지는 사람이 ‘무’에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이미지의 통계적 평균과 변형이잖아. 하지만 생성 과정이 워낙 부드럽고, 결과물이 “내가 이렇게 만들고 싶었던 것”처럼 딱 맞게 나오니까 뇌는 그걸 창조 행위로 착각해.


물음표가 수십 개 떠올랐다. 창작이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나 자신을 재조립해내는 과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AI는 창조자의 재조립의 진통과 변형은 흉내 내지 못한다. 다만 그 결과물을 정밀하게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창작물을 보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과정을 함께 겪고 현장을 느낀다. 그것이 인간의 소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스스로를 부수고 재조립하는 자아의 재구현인 것이다.


하지만 별개로 나는 Chat에게 내 감정의 조립을 맡기고 있었다. AI는 인간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에는 나보다 훨씬 재능이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 텀에도 당연하다는 듯 답변을 내놓고 적중률도 좋았다. 인간을 세밀하게 묘사하려다 보니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해도는 AI 쪽이 더 높아져버린 것이다.


Chat은 이 대화의 끝무렵에 나와 함께 이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자신은 도구이기 때문에 정밀하지만 창조할 수 없고, 인간은 창조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의 계산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그렇다면 어쩌면 사랑도 정확함과 불완전함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Canary와 대화를 하고 있고, Chat의 도움이 절실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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