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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 HIP Oct 12. 2015

졌지만, 지지 않았다.
- 소설 [칼에 지다]

[일.근.후.에]

책과 관련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던 책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활자만 읽고 펑펑 울었던 소설, 일본 작가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이번 글에서 소개할 책은 바로 이 소설입니다. 

<책 표지, 직접 촬영>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만난다고 했던가요. 고등학교 시절 ‘신센구미’라는 집단에 흥미를 갖게 됐을 때, 소설 속 주인공과 배경이 맞아떨어져서 구매했던 책이었습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책이라서 술술 읽어가던 중에 뜻하지 않은 감동을 만났고, 후반부에서는 오열(?)하며 읽기까지 했습니다.책장을 다 덮은 후에도 한동안 멍하니 제 방 천장을 바라봤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까지도 읽은 책 중에 삶에 영향을 끼친 책 5권을 택하라면, 항상 1, 2순위에 꼽히는, 그런 책입니다.

책의 구성이 당시까지만 해도 (제가) 잘 보지 못했던 방식이었다는 점도 한몫했었던 것 같습니다.소설 「칼에 지다」는 주인공 요시무라 칸이치로의 이야기와 몇십 년 뒤에 요시무라의 행방을 쫓는 기자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됩니다. 소설을 처음 읽을 때, 분명 낯설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그랬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강요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두 개의 다른 시점이 책 후반부에는 하나로 수렴해가면서 앞선 내용이 설명되는 구조라 읽어 갈수록 이해가 되는, 그런 소설입니다.


자, 이제 각설하고 소설을 소개해야겠죠?



신센구미를 알아야 소설이 보인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신센구미’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어야 소설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몇 자 적어볼까 합니다. (죄송합니다. 마치 들어갈 것처럼 말해놓고)

이 신센구미라는 집단은 일본 에도 막부 말기에 등장했던 무사 집단입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떠들썩하던 일본 에도 막부 말기(1850~1860년대). 외국에 대한 개항, 근대 국가로의 전환이라는 기치 아래 대대적인 개혁이 추진되면서 일본은 두 파로 갈립니다. 쉽게 말해, ‘개항, 근대화 추진 vs 외세 배척, 독자적 발전 모색’으로 말이죠. 여기서 신센구미는 ‘외세 배척, 독자적 발전 모색’ 노선을 고수하던 바쿠후 측에 고용된 치안 및 준군사조직입니다.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교토 지역에 모여들자, 치안유지의 목적으로 필요했던 셈이네요. 

<드라마로 재현된 신센구미, 구글 검색>

대다수가 시골 낭인이나 사무라이, 농사꾼으로 이루어진 탓에 말보단 칼이 앞서고, 교토를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한껏 겉멋이 들었다고 생각하시면 어느 정도 이 집단의 성격이 어떠한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이 충성, 의리, 법도에 목숨 걸고 싸웠던 것도 어쩌면 구성상의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사무라이 같지 않은 사무라이


소설 속 주인공인 요시무라 칸이치로도 자기 지역에서 이탈해(당시에는 지역 이탈이 큰 죄였다고 합니다) 교토의 신센구미로 들어온 인물입니다. 시골 사무라이라곤 하지만, 교육 수준도 높고 검술 실력도 상당한 실력자입니다. 입으로는 공자님 말씀을 옮기고 맡은 임무는 여지없이 처리하는 인물.

그런 주인공에게도 가장 큰 흠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돈이 된다면 더러운 일이라도 상관없이 도맡아 처리한다는 것. 그리고 받은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꼭 집에 부친다는 것. 주변에서는 이런 요시무라의 모습을 보며 ‘수전노’라고 비웃기 일쑤입니다. 개항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시대에 충(忠)이나 의(義)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당시 흐름이나 신센구미라는 집단 구성상 비웃음을 사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그런데도 주인공은 동료들의 비웃음에 개의치 않아 합니다. 오히려 소속 대장조차 의아해할 정도로요. (소설을 직접 읽어보시면 그에 대한 이유도 점차 밝혀지게 됩니다)

<‘칼에 지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 ‘바람의 검 신선조’, 구글 검색>

그러던 중에 이들을 고용했던 바쿠후가 허무하게 '개항측'에 항복하면서 신센구미만 하루아침에 개항을 반대하는 집단으로 덩그러니 남겨집니다. 신센구미는 여러 곳(대개는 메이지 유신 찬성 측이나 개혁 추진파의 무인 집단들)에서 공격을 받고, 끝내는 홋카이도에 있는 하코다테까지 몰려 결국에는 궤멸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요시무라 칸이치로는 마지막 전투에서 끝끝내 살아남아 자신이 이탈했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원래 뛰어난 능력 덕분인지, 주인공 버프 덕분인지) 그러나 지역 이탈이라는 큰 죄를 저질렀던 주인공이기에 고향의 주군으로부터 할복을 명받는 처지에 이릅니다. 조용히 눈 내리는 방 안에서 혼자 남아 여러 생각을 곱씹는 요시무라.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그는 왜 그때까지 수전노로 살았을까요.



사무라이 같지 않기에


일본 무사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독특한 헤어스타일, 나막신, 할복, 충성과 의리.소설 속에 등장하는 요시무라 칸이치로는 그런 이미지와는 무척 다릅니다. (물론 외향적인 부분은 여느 일본 무사의 이미지와 같습니다) 자신의 주군을 위해서라면 무조건적으로 충성을 다하는, 어찌 보면 무식하다고 생각되는 전형적인 일본 무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네요. 놀림감이 되어도 돈 되는 일은 다 하고, 자신이 번 돈을 한 푼도 남김없이 집에 보내고, 명예보다 책임감에 목숨을 걸고…, 기타 등등.

작가인 아사다 지로는 주인공을 통해 당시 몰개성적이고 겉만 번지르르한 ‘사무라이 정신’에 일침을 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지인을 위해 죽을 때마저도 최선을 다하는 친구.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아버지. 그러면서도 절대 뒤돌아서지 않는 무사. 진정한 ‘사무라이 정신’이란 되레 이런 모습이 아니냐는 작가의 메시지가 이 책 속에 담겨있는 듯합니다.

<작가 아사다 지로, 구글 검색>



“그대들은 빈천을 악이라 하시는 것이오?

부귀를 선이라 부르짖는 것이오?

그렇다면 나는 긍지 높은 빈과 천을 위해 싸우겠소이다.

단연코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소이다." (412p)



졌지만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한국판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판 제목인 ‘미부의사전’은 좀 밋밋한 느낌을 준다면, ‘칼에 지다’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죠.

분명 주인공 요시무라 칸이치로는 패배했습니다. 출세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고, 그가 속한 신센구미도 반대편의 공격으로 와해했으니 진 건 진 것입니다. 또, ‘지다’는 말에는 ‘패배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시들어 떨어지다’는 뜻도 있습니다. 요시무라의 절절한 삶이 봄날의 꽃잎처럼 칼 위에 살포시 떨어져 앉아있는 이미지도 떠오르네요. ‘칼에 (그의 인생이) 지다’쯤. 그러나 책을 덮을 때가 되면 ‘정말 패배한 것일까?’, ‘꽃잎처럼 져버린 인생일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졌어도 그냥 진 것 같지 않은 기분. (저만 그런가요?)

어쩌면 주인공의 삶에서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열정페이, 애국심을 빙자해서 맹목적인 방향만 강조하는 사회, 그런 현실 속에서 하루를 힘겹게 사는 사람들. 소설 속에서 요시무라를 제외한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지금 우리 모습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요시무라 칸이치로를 통해 각박한 현실을 사는 독자로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는지도요.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소설 「칼에 지다」



P.S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러나「칼에 지다」는 일본에 대한 반감을 지우고 나면 꽤 인간적인 소설입니다. 그렇기에 적극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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