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의 여성 롤모델 찾기
조남주 작가의 원작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벌새>는 해외 영화제에서 20개가 넘는 상을 받았다. 여성들의 이야기가 문화 시장에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이 소식이 고무적이면서도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직은 여성의 이야기는 보편적인 것보다는 특별한 것으로 간주되는 동시에 여성의 서사를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으로 부정하는 반인권적인 세력의 저항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개그우먼 박미선은 얼마 전 방영된 스탠드업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여성 연예인으로서의 자신의 입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예능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이어온 베테랑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예능인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에 비집고 들어가 앉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이 또한 낯설지 않은 특별한 보편적 이야기이다.
이제는 스마트폰과 약간의 편집기술만 있다면 누구든 자신의 채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건재한 사회적 혐오는 자유롭게 표현 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나 제한과 규제 없이 직접적으로 혐오가 드러나기도 한다. 혐오는 오랫동안 열광하거나 비난하며 나와 남을 가르는 엔터테인먼트였다.
혐오를 밈(meme)화시켜 놀이처럼 소비하는 지금의 상황은 사회적 문제를 진단하고 인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 동시에 잘 조명되지 않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스스로 꺼내놓을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인스타그램 웹툰으로 시작한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처럼 가족을 가로지르는 여성의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다룬 이야기들 또한 SNS와 유투브를 통해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여성의 이야기를 위한 큰 기회를 주지 않던 편견이 가득하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여성이 스스로 나서서 성과를 낸 이후에야 겨우 여성의 이야기가 ‘트렌드’가 되어 다양한 기회를 위한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현실은 성별 격차와 성차별적 문제가 여전히 산재한다. 공기업조차도 취업과 노동환경에서 여성에게 평등하지 못하다. 코레일의 채용 조작으로 여성 후보자가 좋은 성적에도 면접에서 탈락하고 한국도로공사는 톨게이트 여성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지 않아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이처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거나 늘 사라지기 쉬운 노동에 여성이 놓여있다.
글 정지혜 사진 WSW
오래오래 일할 수 있을까
나와 동료는 그래서 WSW(We are Still Working)라는 팀을 만들었다. 오래 일하고 싶은 우리는 이 현실에서 과연 여성으로서 오랫동안 자신의 일을 해 온 여성 롤모델을 찾 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WSW의 구성원인 우리는 젊은 여성노동자로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신의 일을 여전히 지속해오고 있는 여성 노동 베테랑’을 만나 그들을 롤모델로 삼고 자신의 일에 대한 기술과 철학과 어려움을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로 만들고자 한다.
우리가 베테랑이라 칭하는 분들 또한 완벽한 인권 감수성을 갖추지 못한 부분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완벽함을 갖춰야만 여성주의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렵게 버텨온 오랜 기간의 삶 자체에서 페미니즘적인 서사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가치 절하되어온 여성 노동과 남성 중심적이고 여성을 배제해온 노동 환경에서도 자신의 노동을 지속해오거나, 돌봄노동이나 가사노동 같은 재생산 노동부터, 장애인 여성의 노동처럼 보다 성별화되고 소수자성이 교차된 성격의 노동을 먼저 들여다보려 한다.
여성 베테랑 이야기로 불평등 다시보기
여성노동자들을 베테랑으로 가치를 재평가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은 아니다. 그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오래 일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에 주목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야기를 선택하고 만드는 자의 몫이자 의무이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의 기회조차 오지 않았던 노동에 대해 사회적 제도와 인식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에 절대악은 없는 것 같지만 고통 받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여성 또한 여성혐오 구조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82년생 김지영>과 <동백꽃 필 무렵>의 인물들과 서사처럼 말이다. 불평등
을 들여다보게 하고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것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은 것이 WSW의 책임이자 궁극적인 목표이다. 단순하고 이분법적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인물을 관통하는 많은 사회적 조건의 교차점들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앞으로의 과제이기도 하다. 프로젝트를 진행할수록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은 이야기를 만들고 선택하는 역할로서의 고민이다. 좀 더 면밀하게 고민할수록 선명하게 이야기하기 어려워지는 점이 많아진다.
그럼에도 이 어려운 문제를 지속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이번 특집을 기획한 빅이슈 또한 바로 얼마 전 많은 고민을 통해 성평등한 문화와 빅이슈 내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문제에 대해 고민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앞으로도 이 고민을 기준으로 빅이슈는 표지 모델 선정부터 기사까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여성 의제와 인권 감수성을염두에 둔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여성 인권 뿐만 아니라 소수자 인권에 대한 특집을 지속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노동권과 성폭력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빅이슈내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과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조건 개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경쟁에 지친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힘들고 억울하다. 하지만 때론 누군가는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조차주어지지 않고 관심 갖지 않는다, 반대로 누군가의 분노는 다른 소수자에게 향하고 있다. 이 점은 늘 상기해야할 부분이다. 평등의 문제는 이기고 지는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배제하고 걸러야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운동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강조해야 할 것이다.
WSW에서 만난 여성 베테랑 김혜영 씨. 세운청계상가에서 '솔다방'을 30년째 운영하고 있다.
정지혜 오랫동안 노동을 지속해온 여성 노동자들을 여성 베테랑이라 칭하고 여성 베테랑에 교차하는 다양한 노동권과 여성인권 등에 대해 고민하는 WSW(We are Still Working) 프로젝트를 공동 기획 및 운영하고 있다. 특히 만성질환 당사자로서 아픈 여성의 일할 권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wsw.or.kr
위 글은 빅이슈 12월호 21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