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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25. 2019

추워진 날씨에 다시 생각나는 인연에 관하여


배민영 

사진 Artspace Monthly     





계절의 마술이다. 정신없이 통과해온 여름에 가을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어느새 겨울이 되었다. 카페는 일찌감치 크리스마스 시즌의 느낌으로 갈아입었고 옷깃을 여민 사람들 속에서는 올해 유행하는 코트의 미묘한 라인이 이따금씩 엿보인다. 매해 겨울이라는 같은 이름을 쓸 뿐 사실은 새로운 계절인 것이다.     

하지만 같은 이름을 돌려쓰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사람 인연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는 시즌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인연이라는 말은 ‘관계’라는 말과 묘하게 겹치면서도 은근히 다르다. 관계라는 말도 소중하게 쓰일 때가 많지만, 좀 더 얕고 넓은 개념일 때도 있다. 특히 앞에 ‘사회생활에서’라는 조건이 붙으면 더욱 그렇다. 반면 인연은 좀 더 정서적이고 운명적인 뉘앙스로 쓰이곤 한다. 그래서 부정적인 개념이 되었을 때에도 관계는 ‘적대 관계’처럼 도식화되곤 한다면, 인연은 ‘악연’이라고 하여 굉장히 존재론적인 이야기가 된다. 적대 관계는 승패의 개념이 되거나, 이해 정도에 따라 이용과 충족 관계가 되기도 하지만, 악연은 그야말로 운명적 숙제가 되어버린다. 끊어내려야 끊어낼 수 없는 정신의 시간에 갇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감정은 ‘애증’일 것이다.     

SNS 사회가 되면서 우리는 서로를 보듬어주면서 감시한다. 가장 공개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이다. 보이지 않는 견제와 부정확한 기호, 암시가 순간순간 피드로, 스토리로 올라왔다가 사라지고 보관되고 삭제된다. 그리고 다시 꺼내어진다. 누구도 그 행위의 주체와 대상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족 간의 인연, 현 또는 구 애인과의 인연, 친구들과의 인연이 난해하게 조립되고 해체된다. 잘 정리가 되지 않은 채로 어떤 분절점이 다가오고 우리는 별일 없는 듯 인사를 건네곤 한다. 하루, 한 주, 한 달, 한 시즌, 그리고 한 해가 그렇게 끝나고 시작된다. 약속한대로 가져갈 수 있는 인연이 있기는 할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래도 그 와중에 작은 공간을 두고 평론가와 작가로서 나와 인연을 이어나가는 이가 있다. 그의 이름보다는 “한 달에 한 번 전시 콘셉트를 바꿔본다.”는 목표로 이름 붙인 ‘먼슬리’라는 공간명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 공간의 주인인 작가는 전시 공모나 갤러리의 입맛에 맞출 필요 없이 스스로 최대한 자유롭게 생각하고 설치하고 싶어 이와 같은 일을 벌였고, 약간의 간섭과 협업을 위해 나를 끌어들였다. 그렇게 인연을 맺었고, 때론 개입자로, 때론 관찰자로 공간과 그를 대해왔다. 나는 그의 컨템포러리함과 그에 대한 통찰이 좋다. 컨템포러리 시대라고들 한다. 컨템포러리 아트, 컨템포러리 패션. 왜 이런 말을 쓰는 것일까. 간단히 말해 지금 우리 시대는 ‘현대’라는 말로도 설명이 다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할 수 없는 일들,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제각각 부서진 채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연결된 듯 스쳐가는 것들이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연결(con)된 일시들(temporary)”이란 말로 정의해놓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인연은 너무나 한시적이고 임시적이어서 소중했다가도 소중하지 않았던 것처럼 새어나가는 일이 다반사다. 붙잡으려고 하는 사람이 추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컨템포러리 시대에 인연을 이야기한다는 건 마냥 아름다운 일은 아니다. 무척이나 피곤한 계절이 온 것이다. 잘 정리해보자고 제안을 하자니 이 존재는 쿨해지는 방법도 잘 모르겠고, 너무나 나약하다. 끊어지지 않고 좀비같이 되살아나는 인연이 부담스러워 밤잠 설치는 주제에, 영양가 없이 인연에 대해 주절주절 이만큼이나 쓰고 말았다. 이 글마저도 인연처럼 어떻게 끝맺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의 작업 노트를 옮길 수밖에.  

             

다다와 키키     

작업 노트   

고등학교 첫 수업 시간. 선생님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며 사제지간의 소중함을 말씀하셨다. 수많은 나라 중 한국에서 태어나 같은 학교 같은 반이 될 확률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셨다. 수억 마리 정자와 경쟁 속에 태어난 것부터가 기적이라고도 하셨다. 내가 먼슬리에서 전시하고,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있는 것도 확률로 보면 엄청난 인연인 것이다.        

존재의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부와 명예, 권력, 사랑, 희생 같은 자신만의 가치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개개인이 설정한 존재 이유일 뿐 거시적으로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마시는 물이 한때는 누군가의 오줌이었고, 한때는 거대한 바다였고, 한때는 하늘의 구름이었듯 순환하는 거대한 자연의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식물에게 ‘다다’라는 이름을 주었다. 다다는 이곳에 존재하고, 물은 다다를 만나기 위해 조금씩 나아간다. 흐름이란 것은 위대하다. 다다에게 가는 것이 물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니지만 가다 보면 다다를 만나게 되어 있다. 물이 도착하기 전에 다다가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물은 증발하여 언젠가 또 다른 다다에게 도착할 것이다. 나는 다다에게 제일 먼저 도달하는 물방울에게 ‘키키’라는 이름을 붙여줄 것이다.               


배민영  

살롱공간 취향관에서 편집장, 전시 디렉터, 

시즌테마 기획자 등으로 일하듯 놀고 있다. 

변화하는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위 글은 빅이슈 11월호 21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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