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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25. 2019

[에세이] 은밀하게 위대하게 동거를

서울게이행복주택

    

 정규환  

사진 김찬영     





게이 커플이 살기 좋은 집의 조건은 무엇일까? 법적으로는 결혼을 못 하기 때문에 은밀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 말인즉슨 명절 같은 날, 가족이며 친척에게 우리 집을 드러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또한 ‘우리 이렇게 잘 살고 있어요.’를 증명하듯 집들이 손님에게 보여주기 위한 최신 가전제품을 갖출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아이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방도 하나면 충분하다.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 커플은 아마 자가용도 소유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이다. 축구공이든, 바퀴든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무서워했다. 큰 차보단 귀여운 스쿠터에 관심이 있어 원동기 면허에 응시했지만, 실기시험에서 세 번 연달아 떨어진 뒤, 운전대를 잡는 것은 역시 내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 자전거 타고 한강을 달리는 것은 정말 사랑하고 있다. 안 그래도 미세먼지 때문에 고생하는 이 대도시의 환경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뿌듯함을 느끼는 건 보너스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학군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갈 필요도 없다. 식사와 쇼핑까지 모든 것을 한곳에서 해치울 수 있는 거대한 쇼핑몰도 필요치 않다. 오히려 근처의 조용한 카페와 술집, 도서관, 반려동물과 함께 거닐 수 있는 산책로 그리고 게이 술집과 클럽이 모여 있는 종로3가와 이태원에 지하철로 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래서 30대에 돈은 얼마나 모아야 할까? 결혼과 육아를 위한 투자 그런 것도 필요 없다. 100만 원을 벌면 80만 원은 쓴다. 누군가는 별다른 기술 없이 생산력도 낮은 게이인데다 사회경제적 관념도 무책임하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아마 가까운 미래에 거리에 나앉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우리는 아마 사십이 되어도, 오십이 되어도 이 모습대로 둘이서 큰 변화 없이 살아갈 것이다.      


한편으론 그래서 안심이 된다. 지금까지 듣고 보고 느낀 그대로 갖춰진 취향대로, 끼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이 도시에서 살아갈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투자하는 대신에 오늘의 행복에 집중하기. 그것이 올해 서른이 된 내 라이프 스타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역설적으로 결혼이라는 제도적 보호 장치도, 자식이라는 미래의 보험 등 사회 안전망 부재로 인해 생긴 일종의 생존 본능이다.     


지난 10월 행복주택에 입주했다. 약 45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첨된 서대문구에 위치한 한 대기업 브랜드 아파트. 얼마 전 기사에서 본바 어떤 임대 아파트는 건물 모양과 외벽 색도 다르고 출입로도 다르며 심지어 비상계단까지 만들다 말아서 불이 나면 임대 세대만 탈출할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계약한 이 아파트는 보증금 8000만 원에 월세 20만 원으로 부모로부터 독립한 사회 초년생 기준으로도 그리 만만한 조건은 아니다. 면적은 약 10평. 그래도 신세가 비슷한 또래 청년들에게 이런 기회 또한 ‘행운’인지라, 아파트라는 도시 속 섬, 소셜믹스의 실험쥐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다. 이웃 아파트의 아이들은 놀이터에 출입하지 말라는 안내 문구 같은 걸 볼 때는 묘한 기분이 든다. 이곳에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도시의 질서가 도도히 흐르고 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고, 애인은 김해에서 태어나 대학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왔다. 우리는 지난 4년간 동거를 했다. 2015년 겨울 첫 독립을 했다. 홍제천을 사이로 홍은동과 연희동 어귀를 한 바퀴 돌며, ‘잘 살아보자.’고 다짐했던 나날들. 그 당시 나의 월급은 120만 원이었고, 월세는 55만 원이었다. 동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게이 커플 둘이 살면 월세도 반으로 줄고, 옷도 같이 입을 수 있기에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이는 물론 우리가 비슷한 체형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20대 중반이 된 어엿한 성인이 혼자서 버티기란 그리 녹록지 않은 도시의 삶이었다. 그래서 올해 서른이 된 내 화두는 ‘집’이었다. 4년간 월세로 2500만 원을 갖다 바치고 나니, 30대엔 이제 더는 이렇게 살면 답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런 내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였다. 다시 공부를 시작해 대기업이나 공무원 같은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거나, 흔해 빠진 말이지만 로또에 당첨되거나. 하지만 그 두 가지 역시 쉽게 이뤄지는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나는 월급이 적어도 충분히 도시의 삶을 즐기며 살 수 있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월급의 반을 월세로 갖다 바치지 않고 2년 뒤 계약이 끝난 후 또 어디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함만 없다면 말이다. 행복주택에 애인과 입주한 후 다행히 이 불안함은 감소되었다. 물론 여전히 불안정한 대도시의 시스템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작은 집에서 함께 살면서 우리에게 어울리는 집의 모습에 대한 고민은 계속하고 있다.     

 

처음 내 이름으로 계약한 집에 전입신고를 하고 등본을 뗐는데 내 이름 석 자 덩그러니 있는 것을 보고 ‘아, 정말 내가 독립을 했구나.’라고 느꼈다. 막내인 내 이름은 언제나 부모님, 누나들 밑에 있었는데. 주민센터에 가서 번호표만 뽑고 간단한 서류만 작성하면 되는 이렇게 간단한 일이라는 게 새삼스러웠다. 이번에 이사를 하고 이제 등본을 떼면 애인과 내가 함께 뜬다. 말 그대로 ‘동거인’. 비록 가족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애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서류 떼면 나오는 사이야…”     


우리는 이 집에서 당분간 은밀하게, 위대하게 살아갈 것이다.     


정규환 프리랜서 에디터. 20대의 절반 동안 영화사, 

영화제 및 각종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다. 

매거진 <GQ>, <뒤로>,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 등에 

성소수자 관련 에세이를 기고했다. 인권 운동을 하다가 

만난 게이 파트너와 5년째 동거 중이다.     





위 글은 빅이슈 11월호 21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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