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 박정훈 인터뷰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나오면서 여러 여성 관객들은 지영의 남편 대현에 대해 말한다. 영화에서 화자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책보다 비중이 커진 대현은 평범, 혹은 좋은 남편처럼도 보이지만 지영의 고통을 묵과하고, 이내 지영보다 먼저 울음을 터트리면서 정작 울어야 할 피해자 여성의 자리까지 빼앗는 방임자의 역할을 한다.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하고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자부하는 남성일지라도 일단 성별이 다르다는 것은 상대가 사회에서 받았던 각종 억압이나 피해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남녀는 완전히 다른 영역 안에서 자라고 숨쉬고 다른 역할을 요구받으며 살아왔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생각보다 많은 남성은 ‘나는 여성을 이해하는 좋은 남성’이라고 착각한다. <오마이뉴스> 박정훈 기자는 바로 그 ‘남녀’ 성별의 다름에 대해 말하면서 남성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성찰과 다짐을 담은 글을 꾸준히 써왔다. 그가 여성 이슈에 대해 써온 글을 모은 책이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이다. 제목만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는 고개 끄덕이며 웃게 되는 책을 낸 박정훈 기자에게 <82년생 김지영>과 이를 둘러싼 현상에 대해 물었다.
글 황소연 사진 김화경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 책 제목의 의미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책 제목은 표제글에서 따왔다. 한국의 주류 남성성을 설명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고 평등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남성, 또 여성을 ‘여성성’의 굴레에 가두려는 남성,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폭력적으로 대하는 남성이 집약되어 있는 제목 아닐까 싶다.
<82년생 김지영> 영화와 책이 엄청난 반응을 얻었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이 정도 흥행은 예측된 것으로 알고 있다. 2010년대에 나온 소설 중 유일하게 100만 부가 넘게 팔린 책이다. 사회에서 파급력이 큰 콘텐츠였다는 의미다. 페미니즘은 이미 대세다. 이를 부정하는 시각을 우리 사회가 부추겨온 것 아닌가 싶다. 대통령이나 방탄소년단 RM도 본 대중소설인데, 콘텐츠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남성들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라고 책에 썼다.
작품이 ‘좋다, 싫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페미니즘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같이 보러 가자는 친밀한 관계의 여성에게 “너도 그렇게 힘들어?”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건 파트너로서 굉장히 부적합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책과 소설은 결국 ‘여성의 삶을 이해해달라, 남성이 변화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것도 수용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여성 입장에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 속 김지영의 남편인 정대현이 김지영에게 책임이나 결정을 떠넘기는 모습에 답답해하는 이들이 많다. 정대현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정대현이라는 캐릭터가 이야기하는 건, 사람도 나쁘지 않고, 심지어 가사와 육아 등에 비교적 적극적인 사람들도 결과적으로 관습적인 여성혐오 질서와 가부장제에 동의하는 행위가 주변의 여성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걸 시사한다. <며느라기>의 ‘민사린’ 남편도 그렇다. ‘무구영’은 ‘고구마’ 같지만, 그냥저냥 괜찮은 사람이다. 페미니즘 콘텐츠에서 이런 남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이 아닌 것만으로 현실이 해결되지는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대현 캐릭터가 ‘상위 1%’라는 사람도 있는데, 상위 1%라 하더라도 여성의 삶에 무관심하다면 여성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사실 ‘나 정도면 괜찮아.’라는 생각이 우리 남성들 사이에서 만연해 있다. 그러나 결코 괜찮지 않다. 어떤 편의를 누리고 살아왔는지, 당신 주변의 여성들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보라고 말하고 싶다.
성차별적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그 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려워하는 남성들이 있다. 어떤 말을 함께 나눠볼 수 있을까.
성 구매를 같이 하러 다니거나, 단톡방 성희롱에 동참하는 등의 남성 연대가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방관할 수가 없다. 남성 연대의 공고한 벽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티를 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남성 내의 질서를 할 수 있는 만큼은 균열을 내야한다. SNS에 글을 쓰거나 하는 방식으로라도. 주변의 친구들, 또래 남성들의 여성혐오에 대해서는 “시대에 뒤처진다.”, “니네 무슨 이야기하냐.”고 지적을 해야 하고, 그것을 넘어 자신이 신념이 생긴다면 페미니즘의 가치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본다.
<82년생 김지영> 소설에는 성차별에 대한 다양한 수치가 등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임금 격차나 경력 단절, 성폭력 피해 등 기울어진 운동장을 증명하는 수치를 부정하기도 한다. 이런 현실에서 많은 이들이 좌절하는 것 같다. 어떻게 반박해야 할까.
사실 수치를 부정하는 사람들과는 싸워서 이길 수가 없다.(웃음)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말도 안 되는 것과 싸울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일일이 싸우다 보면 지친다. 나를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제가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도, 주변에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공동체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페미니즘에서 중요한 건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성이라 이익을 본다.’는 자각을 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은데. 이 지점에 오기까지의 시행착오(?)에 대해 이야기해준다면. 남성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본 주변 남성들의 반응도 궁금하다.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주변인들이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고, 그래서 페미니즘을 오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2015년을 기점으로 페미니즘 리부트가 있었을 때,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많이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하나하나 알아가는 느낌으로, 더듬더듬하면서 공부하고 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철도파업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왜 안내방송은 다 여자만 하지?’라고 생각했다. 사회가 안내 혹은 친절을 여성의 영역으로 생각해온 것 아닐까. 식당에서 여성에게 양을 적게 주는 것도 그렇다. “그런 게 뭐 차별이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여성을 2등 시민으로 취급하는 모습 중 하나다.
엄청난 남성 집단과 부딪혀본 적은 없지만, 주변에선 제가 글을 하도 많이 쓰니까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 같다. 인간관계도 많이 정리됐다.(웃음) 이제 페미니즘을 공유할 수 없는 친구들하고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부분이 좀 있다. 그래도 의문을 가지는 친구들을 설득할 준비가 되어 있다.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성폭력 위협 등 여성이 겪는 경험을 축소시키는 흐름은 어떻게 보는가. 사회가 이런 흐름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에 공유했던 경험은 전부 남성 중심적이었다. “왜 우리나라 밤거리가 무섭냐.”, “치안이 얼마나 좋은데.” 등으로 얘기가 됐다.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의 경우,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범죄’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많이 됐다. 그러나 가해자는 여섯 명의 남성을 보내고 여성을 찔렀다. 어떤 남성들은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예민하게’ 같은 태도를 취한다. 자신이 살아보지 않은 경험에 대해선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82년생 김지영>도 그렇다. “살면서 겪기 어려운 나쁜 경험만 전부 모아놨다.”는 비난은, 타인에 대해, 나와 다른 경험을 가진 이에 대해 이해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평등한 관계는 타인의 입장에 설 때 가능하다. 페미니즘과 안티페미니즘은 동등한 것이 아니다. ‘여성인권은 이미 완성됐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언제까지 받아주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이런 메시지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해야 한다.
<82년생 김지영> 책과 영화 이후, 많은 매체나 콘텐츠에서 ‘○○년생 ×××’ 마케팅을 차용한다. 롯데제과 같은 경우 아이스크림 바이럴 광고에 책 속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를 차용해 ‘사람들이 나보고 관종이래’ 같은 문구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마케팅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어떤 메시지로 차용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83년생 돼지바’ 같은 경우, 본인들은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맘충’과 ‘관종’은 단어가 갖고 있는 무게가 다르다. 굉장히 부적절하다. ‘빚투’도 마찬가지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용어를 퇴색시킨 단어다.
남성 페미니스트로서 정체화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해야 할 고민은 무엇일까.
반성해야 한다. 특권을 누려온 것과 우리가 묵인하고 조장해온 폭력에 대해서도.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것이 내 입장을 내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젊은 세대 남성들은 누린 것이 없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최근만 해도 서울메트로의 채용 성차별이 밝혀졌고, 디지털 성범죄는 젊은 남성들이 가장 큰 가해자다. 양진호와 소라넷을 누가 키워주었겠는가. 그런 지점에서 왜 ‘나는 아닌데’라고 넘어가는지에 문제의식이 있다.
반성을 했다면, 침묵을 벗어났으면 한다. 무작정 싸우라는 게 아니다. 남성들의 행동을 지적하는 것이 실천의 시작이다. 저에게 어떤 사람들은 “네 말도 맞는데, 현실은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이 말은 차별을 반박하는 빈약한 논리다. 얼마 전에도 “여성이 승진이 안 되는 현상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말엔 그렇게 질문하면 된다. 당신이 여성으로 태어났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내가 여자니까 넘어가야지.’가 가능하냐고. 페미니즘 운동에도 꾸준히 연대해야 한다.
10년 후, 2029년 현실 속 ‘김지영’들의 모습은 어떨 것이라고 기대하는지.
분명 과거보다 나아지고 있다. 다만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여성들이 경력 단절 이후 영화 속 여성들처럼 수학 문제집을 풀지 않고, 페미니즘 책으로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것이라고 본다. 남성들도 함께 변화해야 하는 압박을 느낄 것이다. 북토크에서 사인을 할 때, 여성분들께는 ‘우리의 답은 페미니즘’, 남성분들께는 ‘더 불편하고, 더 예민하게’라는 문구를 적어드렸다. 지금보다 페미니즘의 목소리는 더 강력해질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실은 변화할 것이다.
위 글은 빅이슈 12월호 21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