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세계에선 무대 위와 아래의 드라마틱한 ‘반전 눈빛’이 큰 매력 요소로 꼽힌다. 무대를 통째로 씹어 먹을 것 같은 맹수의 눈을 했다가 공연이 끝나면 순한 양으로 모드가 바뀌는 것이 일반적인 반전 눈빛의 이미지다. 방탄소년단 제이홉(J-Hope)의 모드는 반대다. 무대 위에서는 몸풀기 중인 유단자처럼 여유로운 표정을 짓지만, 연습실에서는 방탄소년단의 안무 팀장으로서 매처럼 눈을 뜨고 손과 입으로 박자를 세며 퍼포먼스의 디테일을 다잡는다.
‘안무 팀장’은 연습생 시절 별명처럼 얻게 된 직함이지만, 방탄소년단의 무대 스케일이 국내 음악 방송 수준에서 전 세계 스타디움 규모로 커지면서 제이홉의 역할이 진지해졌다. 퍼포먼스 구성과 모니터링뿐 아니라, 공연 스태프들과 대표로 소통하고 복잡한 무대 동선과 유의 사항을 먼저 숙지해서 멤버들에게 설명한다. 월드 투어 중인 멤버들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주변을 격려하고 지지하며 에너지를 북돋는 일도 한다. 제이홉은 프로다. 그는 한 번의 공연을 위해 얼마나 많은 주체들의 논의와 합의가 필요한지, 방탄소년단의 일이 어떤 한계와 시행착오 속에서 설계되는지 안다. 그 자신이 이 모든 복잡한 과정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무 팀장 제이홉은 늘 단정히 옷을 갖춰 입고 출근해 동료들에게 웃으며 인사한다. 한 발만 잘못 삐끗해도 낭떠러지에 처박히는 위험과 불확실성을 가진 케이팝 산업에서, 제이홉의 프로 정신은 그 자체로 사업의 안정성으로 연결된다.
필연적으로 제이홉은 방탄소년단 이상의 방탄소년단을 보는 넓은 시야를 갖게 됐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자연에서 일상을 보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인더숲' BTS편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제이홉은 끼니때에 자리에 없는 멤버들을 챙기고, 운동장처럼 넓은 뜰을 여러 번 오가며 모두를 한자리에 모은다. 편집점을 신경 쓰며 한여름 한낮에 야외에서 물로켓을 만들어 쏘고, 평소 소식하면서도 방송에서는 식사 후에 크로플을 여러 개 굽는다. 티 내지 않고 자리를 정돈하고, 혼자 있는 멤버 곁으로 다가가 유쾌하게 말을 건넨다. 그의 입에서는 내내 “맛있어”, “잘했어”, “좋아”, “그래” 같은 긍정의 표현이 쏟아져나온다. 방탄소년단 소속사 직원들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잘한다.’라는 의미로 ‘제이홉 있다’라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제이홉은 넓은 시야로 팀의 균형을 잡으며 모두를 과정에 동참하게 한다. 무대에서도 일상에서도 그는 ‘팀장’ 역할을 한다. 팀장은 어떤 일을 하는가? 사회생활을 하며 내가 깨달은 바로는, 팀장은 ‘구슬을 꿰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구슬을 깨는 팀장이 더 많은 것 같다.) 제이홉은 방탄소년단이라는 보배를 완성하는 구슬을 꿰는 존재다. 리더는 RM이지만, 조직의 성공을 위해서는 훌륭한 리더만큼이나 전폭적으로 리더를 지지하고, 자발적으로 책임을 나눠 지고, 구성원들과 고루 소통하며 정서적 연대를 다지고, 완결성 있게 일하는 능력을 가진 조력자의 존재가 중요하다. 방탄소년단이 데뷔 8주년을 맞은 지금도 탄탄한 팀워크를 자랑할 수 있는 이유는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가운데서 지탱하는 제이홉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대 위의 제이홉은 빈틈이 없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결 상대를 탈진할 때까지 몰아붙이는 배틀 만화의 최종 보스처럼. 늘 그 이상이 없을 것처럼 완전해 보이지만, 이후에 대면할 땐 반드시 더 완전해져 있다. 20여 년간 아이돌을 덕질하며 온갖 대형 공연장을 다닌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를 하나 꼽으라면, 주저 없이 2019년 방탄소년단 콘서트 중 제이홉의 자작곡 ‘Just Dance’ 솔로 무대를 선택할 거다. 극적인 연출 요소를 거의 배제하고 즉흥에 대부분을 맡겨야 하는 공연을 구성했음에도 거대한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 무대를 꽉 채우는 아우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땀 흘린 시간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는 여유로운 제스처, 정직하게 터져나오는 만족감을 보며 ‘슈퍼스타’라는 말은 제이홉을 위해 태어난 거라는 생각을 했다.
제이홉의 음악은 경쾌하다. 그가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이홉의 음악에는 후회가 없다. 고향 광주에서 춤을 시작하고, 방탄소년단이 되고, 피땀 흘려 성공을 쟁취한 자신에 대한 믿음과 긍정 그리고 끝나지 않을 꿈과 노력을 담아낸다. 그의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는 외면하고 있던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일깨운다. 그래서 노래의 톤과 상관없이 경쾌하게 느껴진다.
제이홉은 늘 “나는 여러분의 Hope, 여러분은 나의 Hope, 나는 J-Hope.”이라고 자기소개를 한다. 그리고 그 ‘hope(희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계속해서 보여준다. 때로는 무대 위에서, 때로는 콘서트 리허설 중인 연습실에서, 때로는 물로켓을 쏘는 숲속에서, 그리고 나의 마음 안에서 제이홉의 희망을 발견한다. 제이홉이 있는 곳에 반드시 희망이 있다.
글. 최이삭
케이팝 칼럼니스트. 인생을 아이돌로 배운 사람. 인스타그램 @isak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