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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y 18. 2022

글 쓰는 삶

과연 나는 쓰고 있는가

©Unsplash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과 함께 혼자 있는 것은, 

아직 인류 최초의 잠 속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 아직 미개간지인 글쓰기와 함께 혼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전쟁 동안 피난처에 숨어 혼자 있는 것이다.

기도도 없고, 하느님도 없고, 그 어떤 생각도 없이.

– 마르그리트 뒤라스


어쨌거나 우리는 쓰고자 했던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쓰고 싶었던 책은 절대 쓰지 못한다. 매번 새 책이 완성될 때마다 만족스럽지 못하고 회의가 든다. 길을 한참 헤맨 기분이고,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는 데 실패한 기분이 든다…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침묵의 망망대해 앞에서 종이 제방을 쌓는 행위다. 

– 실비 제르맹


별수 없다. 이토록 오랫동안 글쓰기로 분투해온 작가들도 앞다퉈 글쓰기 앞에서의 좌절과 글쓰기 앞에서의 고독과 막막함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글을 쓴다는 게 누군가에게는 죽지 않기 위해 절절하게 애쓰는 일이다.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로서는 그러니 끔뻑거리는 커서를 앞에 두고 너무 자책하지 말자며 자위한다. 그러나 이 마음도 잠시일 뿐 수많은 독자의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하는 작가들조차 글쓰기 앞에서 실패와 절망을 고백할진대 그렇다면 나로서는 정말 도리가 없는 일인가 싶어 배가 되는 좌절을 맛본다. 다시, 헤매는 나날이다. 어쩌자고 봄이 왔는가. 어쩌자고 4월이란 말인가. 날씨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기분 탓을 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자고 다시 글쓰기인가.

나는 꽤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영화에 관해 글을 쓰고 말한다. 청탁받은 원고를 쓰거나 영화에 관해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며 영화를 좀 더 잘 보고 듣고 느끼게끔 하는 일을 한다. 또 기회가 닿으면 어떤 영화를 제작하거나 배급하는 데 공적 자금을 좀 더 지원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영화제에서 어떤 영화를 상영하면 좋을지를 심사하거나 기획하기도 한다. 때론 강의나 강연을 한다.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해서 혹은 ‘영화 보고 글쓰기’에 관해서 내 경험에 바탕 해 이야기를 전한다. 상당히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관객들과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창작자와 직접 만나 영화 얘기를 깊이 나눌 때, 능동적인 수강생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함께 강연에 몰두해갈 때면 나 역시 큰 에너지를 받는다. 혼자 작업하는 게 대부분인 내게 그런 접촉과 접점의 순간은 귀하고 중요하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내가 하는 일을 둘러싸고 의문을 품게 된다. ‘이 일들은 정녕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이 일들은 무엇을 향해 있는 것일까.’ 사는 데 있어서 어떤 목적을 상정하고 가야 한다거나 도달해야 할 지점이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럴 필요를 굳이 생각하며 살지 않아온 게 더 오래다. 현실의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런 목표를 둔다는 것 자체가 내겐 비현실처럼 느껴진달까. 그럼에도 이런 의문을 품게 된 데는 내가 하는 일이 잘 쌓이고 있는가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내 노동의 결과물이 서로서로 연결돼 상호보완적으로 시너지를 내긴 하는 걸까 궁금하기 때문이다. 낱장의 종잇조각처럼 분절되고 단절된 노동에 조금 지쳐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어쩌면 이런저런 이유도 다 부차적인 핑계일지도 모른다. 핵심과 본질은 ‘글 쓰는 삶’ 바로 그곳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나는 쓰고 있는가


‘과연 나는 쓰고 있는가.’ 문제는 이것에 있다. 생계를 이어간다는 이유로 점점 더 글 쓰는 삶에서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 꽤 복잡한 얘기기도 하다. 청탁받은 원고를 먼저 소화할 수밖에 없는 프리랜서 글쟁이는 제안받은 ‘그 글’부터 쓴다. 그렇게 쓰고 또 쓰다 보면 제안받은 ‘그 글’들만 쓴다. 언제나 내게 허락된 지면과 요청은 제한적이고 선택적이다. 그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따르다 보면 어느새 내 손가락과 뇌의 근육은 그런 글쓰기에 익숙해져 있다. 글쓰기의 감각도, 글을 쓰고 싶은 욕망도 제한적으로 되고 선택적이며 익숙해진다. 모든 선택에는 당사자의 의지와 외부적 요인이 같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해온 일이다. ‘생계’라는 이름 뒤에 익숙해지는 길로 접어든 것은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었다. 관성화된 몸을 다그쳐야 하는 것도 나요, 한정된 요청을 박차며 나의 글을 계속 써가야 하는 것도 나다. 누가 대신해줄 수 없다.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도 없다. 오로지 나로부터 시작해 나로 끝나는 프리랜서 원고 노동자의 노동 메커니즘은 그렇게 움직인다. 그 메커니즘에 균열을 내는 게 가능한 것인가. 뭔가를 어떻게든 해보려는 힘이 내게 있는가. 내 안에 불쏘시개를 마련하고 그것에 작은 불꽃이나마 지필 점화의 순간을 끌어올 수 있는가. 비관적으로 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쉬이 낙관할 수도 없다.

©Unsplash


글쓰기는  필요하다삶은 그렇지 않다.”


‘글쓰기’에 온통 사로잡혀 살던 때가 있었다. 조금 (아니, 많이) 부끄러운 말이지만, ‘쓰지 않는 삶은 내게 의미가 없다.’라고까지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는 나 자신이 상상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뭔가를 써 내려가고 싶었고 글을 통해 세계와 인물을 만들어내고 싶었지만 그럴 재능이 없고 여건이 되지 않으니 누군가의 창작물에라도 기대어 글을 쓰고 싶었다. 단 하나의 지면이라도 찾기를 바라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문을 두드렸다. 눈물과 방황의 나날이 이어졌고 낙담하는 일이 잦았지만 그럼에도 그 끝엔 항상 글쓰기가 있었다. 쓰고자 하는 욕망만 있다면 두려울 게 없었다. 실비 제르맹이 〈페르소나주〉에서 한 말처럼 ‘쓰고 싶은 욕구, 그게 뭔지 모르지만(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찬 커다란 침묵) 자기에게 익숙한 단어들로 번역하고 싶은 욕구’가 내 안에 꿈틀대고 있었다. 세상 앞에 내가 서 있는 이유, 세상을 살아갈 나만의 방편은 언제나 글쓰기였다. 지금이라면? 물론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내 일에 첫 단에 두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지친 것도 사실이다. 텅 빈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느낌이랄까. 나의 글쓰기는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내 글은 어떤 쓸모가 있는가. 글이 내 곁을 떠나가면 그뿐인가. 그 글은 어딘가에서 잘 살아남았을까. 읽히고 있을까. 글의 형태로 이 세계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나의 흔적들은 앞으로의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 안의 쓰기의 욕망은 언제까지 유효할까.

이 모든 게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이라면 좋겠다. 그뿐이면 좋겠다. 그런데 또 다음의 구절이 눈에 닿고 마음에 박히니 문제가 아니겠는가. 


글쓰기의 몸짓은 실제로 초라하고 원시적이며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많이 드는 몸짓이다… 게다가 글로 쓰인 텍스트의 인플레이션은 글 쓰는 몸짓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모든 사람이 작가이고, 그것은 더 이상 시선을 끌지 않는다. 또한 분명히, 우리 앞에 나타나는 문제들은, 그것은 알파벳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정밀하고 풍부한 기호 체계와 몸짓을 통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비디오의 형태로, 아날로그 및 디지털 모형과 프로그램으로, 다차원적 기호 체계로 사유해야 한다. 그러므로 쓰기는 효율적이지도 않고 실존의 표현으로 유용하지도 않다…. 이 모두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돌파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글쓰기가 더 이상 노력을 기울일 만한 것이 아님을 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한다. 그 동기는, 그들 자신은 그렇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정보를 준다거나 집단적 기억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부조리하다. 그들은 쓰지 않고서는 잘 살 수가 없다. 글쓰기가 없으면 그들의 삶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 고풍스러운 인간들에게는 이 말이 들어맞는다. “글쓰기는 꼭 필요하다, 삶은 그렇지 않다.”(고대 철학자 플루타르코스가 정치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에게 했던 말, “항해는 꼭 필요하다, 삶은 그렇지 않다”에서 차용한 말)  

– 빌렘 플루서 <몸짓들> ‘글쓰기의 몸짓’ 중에서


글. 정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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