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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y 18. 2022

한때 ‘안다’의 대체어가 된

©Pixabay

“우리 프리허그 하며 헤어질까?”

누군가를 안는 행위를 표현하는 말로 ‘프리허그’가 유행한 적이 있다. 처음 프리허그가 한국 사회에 소개됐을 때 그 이미지가 낯설고 놀라워 화제가 됐고, 사람들 사이에서 뜨겁게 이야기되다 보니 급기야 ‘안다’는 말을 대체하는 언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기록을 찾아보니 프리허그가 한국에 널리 알려진 때는 2006년이라고 한다. 계기는 호주 청년 후안 만(Juan Mann)의 동영상(youtu.be/vr3x_RRJdd4)으로, 이 영상은 2007년 유튜브에서 ‘가장 커다란 영감을 주는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나도 그때 대충 본 것도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이 글 쓰며 다시 찾아봤다.

어딘지 예수 같기도 하고, 존 레논이 떠오르기도 하는 5:5 앞가르마를 탄 단발머리 키 큰 남자가 큼지막한 손 글씨로 ‘FREE HUG’라고 쓴 보드지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비척비척 군중 속을 거닐며 영상은 시작된다. 갈 길 바쁜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을 주지 않고 스쳐가고, 드물게 관심을 보인 사람은 비웃으며 지나친다. 그러던 중, 몸집이 자그마한 할머니가 문구를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청년은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추며 팔을 벌린다. 그에게 몸을 맡기는 할머니. 포옹을 ‘준’ 이의 얼굴에도, 받는 이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하다. 그 순간, 흑백이던 영상에 색상이 깃들고, 점차 다양한 연령과 성별의 사람들이 다가온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달려가다 점프해서 그를 힘껏 껴안는 등 창의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나타난다. 그를 안고 난 뒤 ‘FREE HUG’ 보드지를 나눠 들며 동참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프리허그는 이 영상처럼 길거리에서 ‘Free Hug’라고 쓴 푯말을 들고 기다리다 자신에게 포옹을 청해오는 사람을 (비록 낯선 이라도) 안아주는 행위로 알려졌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 거기 깃든 마음 같다. 환대와 위로의 마음이 느껴졌기에 해당 영상의 댓글로 “이걸 보는 내내 자꾸 눈물이 나는데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라는 감상과 자기 주변 사람들과 가족을 안아줘야겠다는 결심이 이어졌을 테다.

개인적으로 좀 더 인상 깊은 댓글은 비교적 최근 남긴 글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집에 앉아 이 영상을 보고만 있는 사람, 나 말고 또 있어?” 이 댓글에 수백 개의 ‘좋아요’로 공감이 표시됐다. 각국 및 지방정부가 강력한 거리두기 정책을 펼치고, 비대면 문화가 확산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프리허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까? 

한 유튜버는 ‘프리에어허그’(youtu.be/zLs5ur8IVcQ)라는 퍼포먼스로 팬데믹 상황을 풍자하기도 했다. 테이프로 표시한 네모난 공간 안에서 상대방과 거리를 둔 채 안는 흉내만 내는 것이다. ‘에어허그’에 호응한 시민들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직접적인 접촉이 주는 근본적인 위안은 얻기 어려웠을 듯 보인다.


팬데믹 시대의 접촉


안는 행위가 주는 위안과 관련해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실험은 심리학자 해리 할로(Harry Harlow)의 실험인 것 같다. 그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 원숭이를 어미에게서 떼어내고, 어미를 대신할 인형을 두었다. 하나는 철사로 만들어 촉감은 좋지 않지만 우유가 나오는 젖꼭지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젖꼭지는 없지만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졌다.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는 ‘실용적인’ 철사 인형과 단지 촉감이 좋은 인형. 당시 널리 퍼진 인식과 달리 새끼 원숭이는 후자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양상까지 보였다. 이에 할로는 애착 형성 과정에서 영양 공급을 통한 강화보다 접촉 위안(contact comfort)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그 뒤로도 신체 접촉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많은 연구가 있었다. 정립된 내용은 (불쾌한 상황이 아니라면) 신체 접촉이 코르티솔 수치를 떨어뜨리고 옥시토신의 분비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코르티솔은 스트레스와 관계있는 호르몬이다. 심폐 활동을 촉진해 더욱 민첩하게 행동하도록 돕지만, 이것이 만성화되면 혈당과 혈압 체계가 교란되고 면역계가 약해져 노화와 질병이 촉진된다. 이 때문에 과도하게 분비되지 않도록 조절하게끔 권고한다.

©Pixabay

반면 옥시토신은 웬만하면 활발히 분비되는 편이 좋다. 옥시토신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뇌 발달에 영향을 미치며, 자신의 신체를 인식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은 특히 발달 과정에 있는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성인에게도 중요하다. 기분이 좋아지게 하고,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옥시토신 분비를 좀 더 의식해야 하는 이유는 코르티솔(길면 26시간까지 지속된다고…)과 비교할 때 효과의 지속 시간이 훨씬 짧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행복’을 위해 옥시토신을 분비할 수 있는 경험의 빈도가 높게끔 일상을 구성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교육계와 심리학계가 비대면 체제의 장기화를 걱정한 것도 이와 닿아 있다. (방역을 위해 필요한 조치지만) 서로 상대를 바이러스 덩어리로 보며 거리를 벌리고, 악수조차 회피하며 주먹이나 팔꿈치를 부딪치는 상황은 다양한 정서적 자극과 접촉이 주는 위로의 결여를 초래하고, 아이들의 발달 과정과 성인들의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서로를 안을 


다행히 거리두기가 대폭 완화되며 팬데믹 전 일상이 회복될 조짐이 보인다. 이제는 좀 더 당당히 탱고를 권해도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외쳐본다. 프리허그 게 섯거라, 탱고에는 아브라소(abrazo)가 있다. 

아브라소는 ‘포옹’이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프리허그를 통해 환대와 위로의 마음을 전하듯, 탱고의 아브라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탱고가 ‘옥시토신을 분비할 수 있는 경험의 빈도가 높게끔 일상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취미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프리허그가 비판받은 부분이 있듯, 아브라소에도 주의할 부분이 있다. 지나치게 장난스레 접근한다든지, 안는 행위보다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든지, 한 사람, 한 사람에 집중하기보다 몇 명을 안았는지 세고 자랑한다든지 하는 태도를 보인 프리허그는 비판받았다. 아브라소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 순간을 함께하는 상대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훨씬 더 큰 집중과 노력이 요구될지도 모른다. 탱고를 춘다는 것은 음악에 맞춰 두 사람이 계속 함께 움직인다는 뜻이고, 이것은 불편을 낳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차라리 그냥 안고 가만히 서 있으면 옥시토신이 분비되고 좋았을 텐데, 상대가 자꾸 거슬리게 움직여서 오히려 코르티솔이 분비될 수 있는 것이다. 지면 관계상 이와 관련한 내 경험은 다음에 더 자세히 풀어보는 걸로…. 


글. 최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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