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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y 18. 2022

월급에 대해선 겸손하지 말자


암기식 교육은 나쁘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수학처럼 개념을 잘 소화해야 하는 학문조차, 문제풀이 요령을 외우는 것으로 공부를 대신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분야에서도 맥락을 놓친 채 단편적인 지식을 외우기만 할 때가 있다. 이는 모두, 아주 큰 잘못이다. 

하지만 지식 암기가 꼭 나쁘기만 한가. 그 역시 아니다. 외국어 공부처럼 반복 훈련이 중요한 분야에선 일단 많이 외워두는 일이 필수적이다. 고전에 대한 이해 역시 암송을 통해 더 깊어질 때가 많다.  

암기의 쓸모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나는 외우는 일의 가치가 대체로 평가 절하돼 있다고 보는 편이다. 숫자 한두 가지만 잘 외우고 있어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암기는 힘이 세다. 

외워두면 좋은 숫자로, 먼저 242만 원을 꼽고 싶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임금근로일자리 월 소득 중간 값, 즉 중위소득이다. 이는 세금을 내기 전 기준이므로, 실제 소득은 그보다 적다. 4대 보험 또는 공무원 연금 등 직역연금에 가입된 일자리가 약 1932만 개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국세청 자료로 소득을 파악할 수 있는 일자리 23만 개를 더하면, 약 1955만 개가 된다. 이들 일자리를 소득순으로 한 줄로 세웠을 때, 가운데에 있는 일자리 소득이 월 242만 원이다. 따라서 전체 일자리의 절반, 즉 955만 개 일자리는 월 소득이 242만 원보다 적다. 통계청 발표를 보면, 금융보험업이 소득이 높고, 농림어업 및 개인서비스업, 음식숙박업 등은 소득이 낮은 편이다. 

통계청 자료를 인용한 언론 보도는 보통 소득 평균값을 주로 소개한다. 세금을 내기 전 기준으로, 2020년 임금근로일자리 월평균 소득은 320만 원이다. 평균값은 전체 소득 분포를 보여주기 어렵다.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자리에 빌 게이츠가 참가하면, 모인 이들의 평균 소득은 폭발적으로 치솟는다. 구호물자를 받는 이들의 소득수준을 보여주는 값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내가 받는 급여가 전체 일자리에서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알려면, 중위소득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중위소득 월 242만 원은 외워두면 좋다. 

얼마 전 한 조사기관이 30~59세 성인 남녀 1140명을 상대로 중산층의 삶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응답자들이 생각하는 중산층 월 평균 소득은 686만 원이었다. 

중위소득 월 242만 원을 외워뒀다면, 이 조사에 참가한 이들의 인식이 실제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상당수 사람들이 중위소득의 2.8배 정도는 받아야 중산층이라고 여긴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실제로는 소득이 매우 높은 상위 계층에 속한 이들이 자신을 중산층 정도로 여기는 비율도 높다는 뜻이 된다. 혹은 소득이 보통인 이들이 실제보다 자신을 가난하게 여기는 비율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17%가 실제 소득 분위 기준으로 상위층에 해당했다. 하지만 이 조사에서 자신의 소득이 상위층이라고 인식하는 비율은 0.7%에 그쳤다. 조사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사회 구성원의 과장된 빈곤감이다. 실제로는 잘사는 사람인데, 스스로 가난하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자기 연민에 빠진다. 

중위소득 월 242만 원을 외우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면, 조사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과장된 빈곤감을 느끼는 이들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정확한 숫자를 기억해야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힘이 생긴다.

자신이 실제보다 가난하다고 느끼는 게 왜 잘못이냐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개인 차원에서라면, 그저 착각일 뿐이지만, 사회 전체 차원에선 해롭다. 만약 입시 준비를 하는 학생이라면, 이해가 된다. 평균이 60점, 중간 점수가 50점쯤 되는 시험에서 80점 받은 학생이 시험을 망쳤다며 속상해할 때가 있다. 이 학생은 목표를 평균보다 훨씬 높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목표를 높게 잡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면서 계속 분발하는 태도를 굳이 비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학생이 아닌 성인, 그리고 시험 점수가 아닌 소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이들 가운데 다수는 수험생이 아닐 것이다. 시험에선 내가 만점을 받는다고 해서, 다른 학생의 점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학생들의 시험 점수는 제로섬이 아니다. 

소득은 그렇지 않다. 내가 많이 받으면, 누군가는 적게 받는다. 경제 전체의 임금 총액은 제한돼 있다. 물론 사람마다 급여가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업무에서 높은 성과를 거뒀으며, 전문성을 쌓기 위해 개인적인 노력을 많이 했고, 업무에 따른 위험을 크게 감수했다면, 당연히 높은 급여를 받아야 한다. 그 정도면 월급이 많은 편이라는 식으로 임금 총액을 깎고 대신 투자자와 경영진의 몫을 늘린다면, 소득 불평등을 키울 위험이 있다. 기업이 창출한 부가가치를 나눌 때, 노동의 몫이 늘어나는 쪽이 불평등이 줄어든 정의로운 분배에 가깝다. 요컨대 노동자 월급이 지금도 많다며 투덜대는 사장을 옹호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다만 내 소득이 사회 전체에서 어떤 위치인지는 늘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정의로운 소득 분배가 가능해진다. 상위권 소득을 거두고 있으면서, 스스로 중간 계층을 자처하면, 하위권 소득을 거두는 계층이 시야에서 벗어나게 된다. 정치인이나 학자, 언론인 등이 이런 태도를 지니고 있으면, 사회 정책 역시 왜곡되기 쉽다. 월 소득이 242만 원보다 적은 995만 개 일자리 종사자를 투명인간 취급한다면, 이는 폭력에 가깝다. 우리 옆에서 뻔히 살아 숨 쉬는 이들을 왜 없는 존재 취급하나. 아침에 출근했을 때면, 사무실 휴지통이 비워져 있다. 휴지통을 누가 비웠겠나. 그들은 월 소득이 얼마쯤이겠나. 

실제보다 과장된 빈곤감, 그래서 깊어진 자기 연민은 내가 실제로는 기득권층일 수 있다는 인식을 방해한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다고 여기는 이가 남과 손잡을 여유를 지니기란 어렵다. 사회 연대란, 나도 힘들지만 내 눈길 밖에는 나보다 어려운 이들이 많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과장된 빈곤감, 무리한 자기 연민은 여유 있는 이들이 소득을 갹출해서 약자를 위한 안전망을 만들고, 그래서 계층 하락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어 다시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시도에 나설 용기를 내게끔 하는 복지의 선순환 구조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다. 

자기 지식과 교양에 대해 겸손한 태도는 아름답다. 하지만 소득과 자산은 겸손이 해롭다. 해로운 겸손을 피하기 위해, 일단 중위소득 월 242만 원부터 암기해두자. 


글. 성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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