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명의 여인들>(2002), <스위밍 풀>(2003), <5×2>(2004), <타임 투 리브>(2005), <엔젤>(2007)까지. ‘악동’이라는 수식이 따라붙곤 하는 감독 프랑수아 오종. 그가 데뷔 이후 비교적 초기에 만든 영화를 집중적으로 보던 때가 있었다. 아트하우스에 존재감을 드러내던 오종 추종자가 꽤 많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무리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열정을 멀리서 지켜보며 뒤늦게 밟는 정도였다. 그러다 한동안 오종이 시들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오종 영화를 봤다. 신작 <다 잘된 거야>(2021). 대책 없는 긍정의 말 같기도 하고, 이미 노쇠할 대로 노쇠한 이가 결과론적으로 하는 넋두리 같은 말 ‘다 잘된 거야’라니.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잊고 있던 오종을 생각해본다. <다 잘된 거야>에 관해 쓰고 있다.
순리를 따르는 순한 악동
<다 잘된 거야>는 오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는 아니다. 수작이라고 말하기에도 부족하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죽음이라는 철학적이고 실존적이며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대하는 프랑수아 오종의 현재적 시선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영화다. 게다가 그 시선은 오종이 적어도 자신의 삶과 창작의 궤도를 대책 없이 허물어뜨리거나 그 자신의 자취를 거스르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관되다. 순리(順理)의 작동이랄까. 오종이 열어젖힌 영화의 길, 여전히 그 길을 따르되, 그가 세월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순리다. 자기 정도를 따르는 순응이다. 물론 여전히 그는 ‘악동’ 기질을 갖고 있다. 그 기질은 전복적이거나 절망으로 치닫는 악랄이나 과격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신망을 이미 충분히 갖춘 이들이 보이는 희망 어린 가능성이 그의 악동기의 근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중에서도 순하디순한 버전으로, 최대한 현실 밀착형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오종의 선물
“끝내고 싶으니 도와다오.” 뇌졸중으로 쓰러진 <다 잘된 거야>의 앙드레(앙드레 뒤솔리에)는 큰딸 엠마뉘엘(소피 마르소)에게 청한다. “이건 내가 아니니”, “이젠 죽고 싶다. 이게 내 뜻이다.” 죽음에 확고한 의지를 보이는 아버지 앞에서 딸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존엄사는 그들이 거주하는 파리에서는 위법이라 스위스 베른까지 가야 한다. 존엄하게 죽겠다는 앙드레의 입장, 그것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존엄사를 준비하는 엠마뉘엘과 둘째 딸 파스칼(제랄딘 팔리아스). 영화는 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과 마지막을 향해 떠나는 앙드레의 여정을 담았다. 앙드레는 꽤 복잡한 인물이다. 아내와는 준별거 상태이고 동성 애인이 있으며 종종 변죽을 울렸다가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버린다. 그야말로 ‘악동’. 앙드레와 엠마뉘엘 사이는 조금 특별해 보인다. 엠마뉘엘의 우울과 악몽의 원인을 거슬러 가보면 극적인 악동기를 발휘하는 앙드레가 떡하니 버티고 섰다. 앙드레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달라는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엠마뉘엘에게 한 것에 관해 파스칼이 한 말이 날카롭게 남는다. “언니, 아빠 싫어했잖아. (아빠의 부탁이) 언니한테 선물일 수 있어.” 이상한 말, 어쩌면 위험하게 들릴 수 있는 이 말을 무심히 던져두는 오종은 ‘악동’이긴 하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오종 영화의 핵심이 있다.
오종의 세계가 꿈꾸는 새로운 가능성
앙드레의 이런 선택은 이 가족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파괴적 행위거나 절망적 결과로의 귀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각적으로 그의 한참 전 영화 <타임 투 리브>가 떠오른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젊고 유망한 사진작가 로맹(멜빌 푸포). 그는 자기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선물’ 같은 존재에 눈을 뜨고, 반대로 그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기에 이른다. 그뿐인가. 떠나는 자가 세상에 남긴 ‘선물’은 새로운 가능성이 된다. <다 잘된 거야>는 <타임 투 리브>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짝패로 보일 만하다. 두 영화가 만들어진 물리적 시간 차만큼 나이가 든 오종은 젊은 로맹의 자리에 80대의 앙드레를 두고 자기 안에 계속 품고 있던 화두를 풀어놓는다.
최후의 순간, 그 앞에서
존엄사는 한 개인의 실존적 문제인 동시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느냐는 경제적 여력과 결부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선택지는 고려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부담이다. 오종은 앙드레를 통해 이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정확히 말로 전한다.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이것이 그의 영화적 세계를 움직이는 핵심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그리고 오종은 최선을 다해 깔끔한 최후를 위해 나아간다. 그 마지막 지점에 이르면 어떤 뭉클함까지 있다. 그때 파스칼이 무심히 던져두고 간 ‘선물’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떠올린다. 그 선물의 실체는 무엇일까. 앙드레가 남긴 선물일까, 앙드레 그 자신이 곧 선물일까, 엠마뉘엘이 받아 든 선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선물이 될 수 있을까. 한없이 단순하게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질문이 한번 들고 나니 꼬리를 물고 복잡해진다. 떠나간 이는 무엇을 남겼는가. 그렇다면 남은 이는 무엇을 받아 안은 것인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건, 이제 이 영화를 볼 미래의 당신 몫이다. 그저 지금의 오종은 이렇게 말할 뿐이다. “다 잘된 거야.”라고.
글/ 정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