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농부 박신연숙
박신연숙은 ‘바쁘다 바빠’ 현대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집 앞의 아현 자연학습장에 나가 꽃의 생육 상태를 살피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토요일에는 상암에 자리한 공동 텃밭을 가꾸고, 목요일 오후와 주말 낮에는 아현에서 마을정원사 과정의 강사로서, 정원사로서 흙을 만진다. 이 밖에도 마포구 곳곳의 공공 정원을 관리하고 함께 도시 정원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느라 잰걸음으로 서둘러 걷는 그에게 ‘농업’이나 ‘원예’에서 연상되는 여유는 찾아보는 힘들다. 그러나 15년간 여성주의 활동가로 일해온 페미니스트로서, 동료 여성들과 텃밭을 일구고 자기 삶을 가꾸는 방법을 나누는 지금의 삶이 바쁘고 바빠도 행복하다. 흙을 만지며 도시의 아침을 깨우는 빠르고 가벼운 발걸음의 소유자 박신연숙을 만나보자.
언제부터 농업과 원예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30대 초반에 독립해서 살다가 집 앞에 화분을 놓기 시작했어요. 화분이 100개를 넘었죠. 그러다 동네 자투리 공간을 탐내기 시작한 게 2007년쯤이에요. 일하던 단체에서 동네의 자투리 공간을 찾아내 식물을 가꾸는 모임을 시작했어요. 아현동에 이사 오기 전에 상도동에서 10년 가까이 그런 활동을 했어요.
여러 곳에서 원예와 농업을 하고 계시죠.
마포도시농업네트워크에서 주민들에게 분양하는 텃밭이 상암에 있고, 제 개인 텃밭은 고양시에 있어요. 또 이곳 아현동 정원도 있죠. 여기는 어떻게 가꾸게 되었느냐면 이사 와서 산책하다 보니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 눈에 띄었어요. 아무도 가꾸지 않는 곳이었죠. 그래서 구청에 전화해 누가 관리하느냐고 물었더니 관리자가 없대요. 그래서 주민들이 관리해도 되느냐고 물으니까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삼삼오오 원예를 좋아하는 주민들을 모아서 작게 모임을 시작한 게 지금은 정원사 수업도 하고, 모든 주민이 오다가다 꽃구경을 하는 곳이 되었죠.
지난여름에 큰비가 내렸죠. 도시 농업을 하면서 기후위기를 체감하는 순간이 있었나요?
올봄에 엄청 가물었고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왔죠. 농사짓고 정원을 가꾸니까 기후위기를 심각하게 체감해요. 요즘 자연주의 정원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해요. ‘서식처 기반 정원’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자연을 모방한 정원을 만들거든요. 옛날에는 정원이 다 인위적이었어요. 특히 공공 정원이나 아파트 내 정원은 병해충을 방지한다고 주기적으로 농약 치고 물에 성장촉진제를 넣는 식으로 땅과 작물을 많이 파괴했어요. 근데 지금은 좀 더 자연스럽고 생태적인 방식으로 해요. 여기만 해도 농약을 전혀 안 써서 지렁이가 많아요. 물도 많이 안 줘요. 갓 심었을 때만 뿌리를 내려야 하니까 물을 주고, 그다음에는 이 환경에 적응하고 땅 깊숙이 있는 수분을 빨아들이도록 하는 거죠. 그런데 올가을에는 워낙 가물어 식물이 못 견디고 죽을 것 같아서 물을 좀 줬어요.
많은 도시 사람이 농업은 무척 힘들고, 본인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젊을 때는 페미니스트로 살다 보니 ‘살림을 왜 여자들만 해야 하지? 나라도 하지 말아야지.’ 싶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살림의 진가를 느껴요. 농사도 살림이거든요. 제가 정원의 풀을 정리한다고 누가 알겠어요. 사람들은 꽃만 볼 뿐 풀이 있다가 없어진 건 잘 모르죠. 집에서 하는 일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텃밭에서 한두 시간 일하면, 집에 가져와서 다듬는 데 두 시간, 요리하는 데 두 시간, 이런 식으로 시간이 막 가요. 그런데 이게 바로 생활의 기술을 익히는 거죠. 도시인은 돈을 주고 모든 걸 사 먹는데, 집 안에서 상추 하나라도 키워서 내 밥상에 올리면 자기 효능감이 높아지죠.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아요. 도시인으로 살다 보면 제 손으로 의식주 중 무엇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도시와 농촌이 분리되면서 텃밭을 마치 취미 생활처럼 여기는데, 전 도시 농업도 자립 기술의 일종인 것 같아요. 밥상에 내가 키운 상추로 샐러드 만들어 올리는 일이 자기 얼굴 씻는 거와 다름없어야 한다고 봐요. 그러기 위해서는 지자체 정책부터 달라져야 할 것 같아요. 모든 시민에게 농사지을 권리를 부여하고, 빈 땅이 있으면 방치하거나 기업에 주지 말고 주민에게 되돌려줘야죠.
페미니스트로서 농업에서 여성주의를 어떻게 실천하고 있나요?
페미니즘과 생태 감수성은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돼요. 제 안에서 그 두 가지가 만날 때 제가 가장 충만해지는 것 같아요. 보통 자연 생태계는 서로 경쟁적이라고 보는데 그렇지 않아요. 꽃이 같은 종류라도 가지가 같은 경우는 없고요. 정원의 모든 식물이 햇빛을 독점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요. 햇빛뿐 아니라 뿌리끼리도 서로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고, 죽어갈 때는 남은 에너지까지 옆 동료에게 나눠주고 죽어요. 알면 알수록 자연에서 여성주의적 모습이 많이 발견되죠. 그러다 보니까 주민 모임을 운영할 때도 여성주의적 조직 문화가 자연스러워져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 자신의 성 평등 감수성, 언어 사용과 관계 맺는 방식을 긴장하고 조심해야 하는데 보통 안 그러잖아요. 처음 만나 ‘어머니’라고 호칭하는 사람한테도 “저 어머니 아니거든요. 모든 여성이 어머니는 아니에요. 그런 가족적인 표현은 가족 내에서 쓰세요.”라고 말하죠.
일각에서는 기후위기 시대에 농업에 종사하는 게 ‘위기’이자 ‘기회’라고도 해요. 기후위기와 농업을 연결해 전망을 분석하는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도시에 살면서 이렇게 농사짓고 정원을 가꾸는 건 지구인으로서 하는 실천이기도 해요. 그런 점에서 기후위기가 농부뿐 아니라 도시인에게 경각심을 일깨울 기회가 될 거라고 봐요. 인간이 훼손해온 자연의 변화가 결국 인간에게 재앙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걸 느낄 기회요. 코로나19 시기에 사람들이 반려 식물에 관심을 갖는 점이 반가웠는데, 조금 더 나아가 자연 생태계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가 생기면 좋겠어요.
작물을 키운다는 것, 정원을 가꾼다는 것의 재미는 무엇인가요?
저는 처음에 꽃의 아름다움에 반했거든요.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흙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있어요. 텃밭이나 정원의 흙이 달라지면서 거기서 나는 향기가 느껴지고요. 그 흙에 사는 토실토실한 지렁이가 보이기 시작하는 거죠. 다 흙 아래 미생물들이 해내는 일이죠. ‘정원가는 식물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돌보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농사를 지으면서 이 말에 공감하게 됐어요. 결국 식물이 딛고 살아가는 토대는 흙이잖아요.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내가 무엇을 딛고 살아가는지 알게 돼요. 저는 여기에 거의 매일 와서 정원을 가꾸거든요.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이자 저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기도 해요.
글. 양수복/ 사진. 김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