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팀 마무리 투수가 경기를 끝맺으려 마운드에 선다. 공의 실밥을 평소보다 더 깊이 감싼다. 손가락 끝의 핏기는 사라져 하얗게 변한다. 타자는 배트를 더 날카롭게 세운다. 손 뭉치를 움켜잡은 장갑에서 가죽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아랫배에 힘을 모으고 허리는 빠른 회전 운동을 대비한다. 포수는 투수를 향해 미트를 더 크게 벌린다. 해저 깊은 곳의 아귀가 먹이를 삼키듯 투수의 공을 빨아들일 기세다. 야수는 조금 더 지면으로 무릎을 내린다. 뒷주머니의 로진백을 움켜잡는다. 엉덩이를 조금 더 세워 몸의 무게중심을 낮춘다. 에러는 곧 패배임을 잘 안다.
심판은 플레이를 외치며 운동장에 내린 적막을 가른다. 양 팀 덕아웃은 동시에 분주하다. 감독의 눈매는 매서워지고 코치는 손짓, 몸짓으로 작전을 보낸다. 대기 선수들은 함성과 야유로 동료를 자극한다. 어느 순간보다 집중과 협력이 필요하다. 곧 승패가 갈리기 때문이다.
야구장 수천 개의 눈동자는 7.5cm의 공 하나에 모인다. 투수의 일구 일구에 고개가 돌아간다. 주심의 스트라이크와 볼 판정에 탄식과 함성이 쏟아진다. 타자의 방망이 끝으로 시선은 이동한다. 스윙 한 번에 환희와 한탄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3아웃까지 계속 반복한다.
9회 말의 초침은 다르게 움직인다.
나머지 8개의 이닝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인데, 9회 말에는 상대성 이론이 적용된다. 공은 더 빨리 공간을 가르지만 시간은 더 천천히 그라운드 위를 흐른다. 선수들의 모든 에너지가 야구공에 모여 지구를 천천히 돌린다. 지구보다 더 큰 중력을 가진 목성에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듯, 9회 말도 마찬가지다. 목성의 중력을 받는다.
그러나, 9회 말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지만 그 길이는 순간이다. 경기가 끝나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른다. 슬로비디오가 찰나로 압축된다.
필사 시간도 상대성이론의 영향권이다.
필사 시간의 모든 1초는 2초보다 더 길다. 눈동자는 책의 텍스트와 내가 쓴 텍스트를 천천히 관찰한다. 손끝 신경은 연필심에 모이고 종이 위에 펼쳐지는 흑연의 흔적과 소음에 모든 감각이 반응한다. 획 한 번에 반성과 기쁨이 교차하고 획 두 번에 실망과 감동을 썼다 지운다. 한 획 한 획에 진심이 담긴다.
그러나, 필사의 진행은 더디지만 끝나고 보면 잠깐이다. 15분이 1분처럼 흐른다.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끝나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