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는 몰입을 요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책, 노트, 펜 이외의 어떤 물질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 텍스트, 낭독, 글씨 이외의 어떤 무형도 끼어들 수는 없다. 잔잔한 음악과 주광색 조명, 약간의 잉크 냄새와 종이 향기만이 필사를 돕는다.
필사는 책 속의 텍스트에 전념하는 시간이다. 눈으로 읽고 뇌에서 되새김질, 펜 잡은 손으로 배설하는 시간이다. 작가의 언어는 손글씨로 다시 태어나 가슴 한구석에 조용히 가라앉는다. 필사는 손으로 문장을 퇴적하고 압축하여 단단한 내면층을 생성하는 인고의 시간이다. 지구의 지층 두께가 시간에 비례하듯, 마음 그릇의 넓이도 필사의 시간에 비례한다. 양질의 흙이 빼어난 층리의 재료가 되듯, 양서의 글 필사는 심연의 향기를 짙게 한다.
필사 중에 파고든 찰나의 잡념이 쪼갠 그 틈은 거칠다. 잡음에 귓등이 살짝 움찔해도 마찬가지다. 손끝에서 떨림과 오차가 바로 피어난다. 그 진동과 편차는 펜을 통해 글씨를 순식간에 바꾼다. 오자와 탈자는 물론이며 뇌와 귀를 잠깐 스쳤던 단어 중 하나가 필사의 중간을 파고든다. 필사는 삐끗하고 만다.
집중력을 계속 유지하는 각고의 노력은 필사를 풍성하게 만든다. 오로지 문자와 문맥으로 향하는 내 글씨의 전력투구는 필사의 농도를 짙게 한다. 책상 한 모퉁이를 꽉 채우는 치열한 나의 필사는 더 큰 어른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