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할 때, 신혼여행을 갈 때의 장면을 그릴 때 단순히 행사 이야기만으로는 좋은 글이 되질 않는다. 그날의 여러 장면들이 여러 시선에서 겹쳐 보여야 글이 풍부해진다. 아무리 평범해 보이는 하루라 해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돌출된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 있기 마련이다.
회사 회식이다.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서 고참으로 꼭 참석한다. 고기를 굽고 술잔이 오간다. 내 앞에는 반쯤 채워진 물 잔만 놓여있다. 건배 분위기라도 맞추기 위해서 생수로 잔을 채웠다. 소주를 부은 기분이라도 내려는 의도다.
술을 끊었다. 담배는 의도적으로 끊었는데 술은 다른 방식이다. 2년 반전 하루아침에 뇌졸중 환자가 되고 1달간 병원 신세를 지고 퇴원하던 날, 담당 의사가 술을 마시면 금방 다시 자기를 볼 수 있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그 경고장 덕분에 그렇게 즐기고 좋아하던 술을 하루아침에 끊었다. 죽기는 싫었나 보다.
그 후로 맥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회식 분위기는 갈수록 적응이 되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콜라, 사이다로 배만 채우다 1차만 하고 슬금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내장은 점점 술맛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숙취라는 고통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오늘 회식은 좀 달랐다. 최근 업무가 많아서인지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가끔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사뭇 진지해야만 하는 회식이었다. 1차만 하고 굿바이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9시가 가까워지니 시계에 자꾸 눈이 갔다. 10시에 필사 방송을 해야 하는데, 시간을 지키려면 잠시 후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하고, 유튜브 채널 커뮤니티에 공지 글을 올렸다. '오늘 필사는 11시에 합니다.'
10시 반이 되니 초조해졌다. 한 번 미룬 약속 지키려면 지금은 차에 시동을 걸어야 한다. 회식은 2차에서 멈추질 않는다. 잔이 비고 다시 맥주가 채워진다. 맹물에 먹태만 먹으니 속이 편치 않다.
무엇이든 끝은 있다. 집에 오니 11시 10분. 늦었다. 그것도 10분이나. 필사 방송 약속을 어긴 적이 별로 없다. 건너뛴 날도 그리 많지 않다. 피곤했지만, 옷만 갈아입은 채 책상 앞에 앉았다. 방송을 켜고 책을 읽고 글씨를 써 나갔다. 쏘아 올린 위성이 궤도에 안착하 듯 필사는 잘 흘러갔다.
필사가 끝나니 11시 반이 넘었다. 내일도 아침 일찍 출장이니 잠을 빨리 청해야 하는데, 그냥 자기에는 찝찝하다. 매일 하기로 나와 약속한 일이 또 있기 때문이다. 팔굽혀 펴기 하루 약속치를 하고 씻고 자리에 누웠다.
너무 늦었으니 오늘 필사 일기는 짧게 쓰고 자야겠다고 마음먹고 폰에 일기를 쓴다. 한두 줄 쓰려했는데 9 문단째다. 쓰기 시작하니 생각들이 줄줄 이어지며 처음 생각과는 완전 딴판으로 흘러간다.
내가 왜 지금, 12시 25분이 돼서도 이렇게 어두운 방 침대 위에서 글을 쓰고 있는지 그 이유를 꼭 써야 한다는 맘이 들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