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든 철학이든 공부를 하면 거기에는 수많은 인간이 등장하고 그들의 흥망성쇠와 고통이 정면과 배면에서 나온다. 안타까움으로 때로는 흥분으로 책을 읽으면서 그 감정이 우리의 뇌와 가슴에 새겨진다. 경험한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이 속에서 정신은 각성된다. 공감할수록 더 많이 느껴서 한 줄의 글을 쓰고 그다음 적절한 상황묘사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얼굴 생김새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듯이, 세상 모든 사람의 글씨체를 단어 하나로 나타내기 힘들다. 하지만 글씨체라는 집합이 있어, 글씨를 바꾸는 이들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주로 유래나 모양에 따라 글씨체를 나누는데, 여기서 말하는 정자체는 내가 어릴 때 서예 선생님께 배웠던 한글 서예 정자체를 말한다. 다른 글씨체를 모두 꿰뚫고 있다거나, 정자체의 정석을 마스터했다는 의미는 아님을 밝혀둔다. 국민학교 5학년에 잠깐 배웠던 짧은 지식과 실습에 바탕을 둔 소견임을 재차 밝힌다.
추측하건대, 정자체는 글자를 정자(正字)로, 즉 바르게 쓰는 글씨체를 말할 것이다. '바르게 쓴다.' 어떤 글씨체든 바르게 쓰는 게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름의 뜻에서뿐만이 아니라, 정자체의 기본과 원리는 좋은 글씨의 가늠자가 된다고 믿는다.
서예 학원 첫날은 먹 갈기로 시작한다. 글씨를 쓰기 전 벼루에 먹을 갈며 정신을 모은다. 서예에 온통 집중하기 위한 사전 의례라고 할 수 있다. 먹을 비뚤 하지 않게 갈며 화선지에 알맞은 먹물 농도를 찾는 노하우는 시간이 가면 저절로 생긴다.
글씨를 쓰기 전에 펜을 고른다. 초보라면 연필이 좋다. 칼이나 연필 깎기로 연필의 끝을 다듬는다. 종이에 흑연이 잘 내려앉는 끝 모양을 찾는 능력도 짬밥이 해결한다. 싸인펜도 비슷하다. 펜심을 적당히 기울이는 길들이기로 최적의 펜으로 만든다. 볼펜은 잉크가 잘 나오는지 체크하는 것으로 퉁친다.
두 번째 날부터는 선 긋기다. 가로, 세로의 직선, 비스듬한 선, 원, 곡선 등을 연습한다. 선 굵기의 변화로 기술을 한 단계 높인다. 붓의 진행속도 변화로 획의 변화를 익힌다. 획 시작과 끝 모양을 바꾸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노트를 펼치고 선을 긋는다. 마찬가지로, 기본 선 긋기를 반복 연습한다. 노트 바탕의 템플릿으로 획의 기울기, 편평함을 가늠한다. 그 위에 덮어쓰며 손에 충분히 익힌다. 획의 굵기, 속도 변화, 시작과 끝의 변화도 같이 적용한다.
그다음은 획의 연결이다. 자음, 모음으로 확장한다. 붓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통증이 생기기 시작한다. 잘 쓸려는 노력은 오히려 몸을 고단하게 한다. 힘 빼라는 스승의 가르침이 이어지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힘 빼는 순간 화선지 위에는 끌 날카롭고 드문드문 흰 바탕이 보이는 획이 그어진다. 손에 힘은 더 들어간다.
펜으로 쓰는 획 연결은 어렵지 않다. 1센티도 되지 않는 크기 속에 이어진 선은 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머릿속의 획과 전혀 다른 획이 그어진다. 가소롭게 여기다 큰코다친다. 손가락에 힘이 들아가고 아픔이 스멀거린다. 힘 빼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화선지 여백에 자음과 모음이 합쳐진 한 글자를 쓴다. 초성, 중성, 종성에 변화를 줘, 보기 좋은 글자를 익힌다. 모음의 종류, 종성의 유무에 따른 글자의 모양도 같이 연습한다. 단정한 한 글자들이 모여 글씨체가 되기에 연습에 연습을 반복한다. 명필이 멀지 않았다.
초등학생용 8칸 또는 10칸 국어 노트를 마련한다. 한 개의 네모칸에 하나의 글자를 쓴다. 지금까지 익혔던 획으로 자모음을 쓰고 조합한다. 초성과 종성을 변수로 두고 여러 조합의 글자를 써 내려간다. 여백의 미를 살리는, 네모 공간에 가장 적당한 글자 크기를 찾아나간다.
화선지를 접었다 펴 주름을 만든다. 그 주름을 글자 배열의 기준선으로 삼는다. 세로 쓰기가 먼저다. 기준선 위에 글자 정렬 쉽지 않다. 글자 시작점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반복으로 일정한 시작점을 익힌다. 조금씩 고른 글씨를 쓸 수 있다.
가로줄 노트를 돌려 세로줄을 만든다. 세로쓰기는, 실생활에 잘 쓰지는 않지만, 분명 도움이 된다. 일정한 크기의 글씨를 쓰는 데 가장 효과적인 연습이다. 줄 간격이 다른 노트로 옮기면서 글자 크기도 바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