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내 글씨를 보고 상당히 침착하고 꼼꼼한 인간이라 유추한다. 책도 많이 읽고 말도 침착하게 잘할 것 같다며 그 모습을 단정한 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묻는 경우가 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중범죄를 짓는 기분이다. 사기죄.
평소 글씨는 필사 글씨와 많이 다르다. 악필은 아니지만, 필사 글씨를 보고 평소 글씨를 유추하기는 어렵다. 외출복과 잠옷과 같다고 할까? 때와 장소에 따라 달리 쓸 뿐이다. 평소 글씨에는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덤벙거리며 주의 깊지 못하는 대충대충 인간의 모습이 획에 잘 나타난다.
필사 시간이 시작되면 나는 안경 쓴 클라크에서 빨간 망토 두른 슈퍼맨으로 변한다. 평범한 대학생에서 거미줄로 어려움에 빠진 시민을 구하는 스파이더맨이 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급 변신을 매일 한다. 급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12살 때 배운 서예 덕분에 고운 글씨체를 가지게 되었지만 성격은 고쳐지지 않았다. 다만 변신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계획형 인간도 아니다. 잘 짜여진 패키지여행보다는 '떠나고 보자'하는 무계획 여행을 더 좋아한다. '계획에 맞춰 착착'보다는 '어째 되긋지'라는 진행 방식에 마음이 더 기운다. 한 달, 일 년의 장기 계획보다는 순간순간을 특별하고 재미있게 보내는데 열중하려 한다. 책 한 권을 독파하기보다는 자주 머무는 곳에 책을 두어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필사에 진심이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 대책 없는 사람을 극도로 싫어한다. 현실에 안주하는 인간이길 거부한다. 무인도에 한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면 책을 선택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