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평생 운전면허증이 없이 살았다. 운전을 하고 싶은 욕구가 전혀 생기지 않았고, 운전을 좋아하는 아내에게 차를 양보한다는 그럴듯한 명분도 있었다. 무엇보다 매사에 조심하는 성격인 J는 운전석에 앉으면 긴장을 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첫돌이 될 무렵, 운전면허시험에 도전했지만 신호를 잘못 보고 출발하는 바람에 제대로 운전을 해보지도 못하고 실격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날 이후 J는 운전면허시험에 재도전하지 않았다.
J가 운전을 하지 않으니 집안의 운전사 역할은 오롯이 아내 몫이 되었다. 명절에 부모님 계신 시골에 내려갈 때도, 가족 여행을 갈 때도, 장을 보러 갈 때도 항상 아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대신 J는 커피, 과일, 오징어 같은 간식거리를 준비해서 조수석에 앉아 아내의 입에 넣어주며 졸리거나 피곤하지 않는지 아내의 상태를 눈치 빠르게 살피고 보살피는 역할을 아주 잘했기 때문에 아내도 그런 J에게 별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전,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것이다. 상을 당하여 황망한 아내에게 운전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에 빠진 J에게 친한 직장 후배가 위로를 전하기 위해 다가왔다. 사정 얘기를 들은 후배는 흔쾌히 지방의 장례식장까지 운전사 노릇을 자처해 주었다. '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 J는 그 후배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위기를 넘긴 J가 굳이 운전면허증을 따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2년 전 알바를 하기 위해 이력서를 쓰던 날이었다. 평생 다니던 직장에서 은퇴를 한 J는 용돈이라도 벌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력서를 쓰다가 생각지 못했던 충격적인 현실에 직면해 버린 것이다. 자격증 칸에 적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 텅 빈 새하얗고 깨끗한 자신의 이력서가 말똥말똥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지금까지 지켜오던 천연기념물과도 같았던 무면허의 자부심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J는 당장 운전면허학원을 등록하고 시험에 도전하여 드디어 면허증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이력서에 운전면허 소지 사실을 한 줄 적어 넣었다. 새로운 신분증이 생긴 뿌듯함은 예상하지 못한 덤이었다.
그렇게 J의 운전면허 획득은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운전은 여전히 아내의 몫이고 J의 자리는 조수석이다. J의 운전면허증 취득은 처음부터 이력서에 한 줄을 써넣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으므로 목적은 달성되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달라진 것은 그뿐이었다. J에게는 참으로 심플한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