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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EHAN Dec 11. 2017

[매거진 쓰다] 교만한 선언  




1. 어릴 적부터 성당을 집 마당처럼 오가며 공도 차고, 던지고, 달리기도 해보고, 개들에게 쫓기기도 하면서 그렇게 내 어린 날의 여러 기억은 ‘천주교 광양 성당’ 안에 녹아 있다. 성 가정을 표방하며 매주 토요일이면 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러 가던 일이 당연했고, 그러한 이유로 무한도전은 늘 재방으로 봐야만 했다. 복사단을 통해 신부님 옆에서 미사보조도 했고, 견진성사도 받았고, 서너 명의 대자도 두었다. 난 자랑스러운 신자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세상을 떠났을 땐 평화방송을 시청하며 내 일처럼 마음 아팠고, 베네딕토 16세가 새 교황으로 추대되었을 땐, 조선 시대에 왕이 바뀌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하곤 했다. 심지어 나는 크면 신부님이 될 줄 알았다. 대학생이 되어 광양성당을 떠나기 전까진.


2. 대학교를 부산으로 오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가족 모두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야 한다 거나, 명절에 주말을 이용해서 친척 집을 방문할 때면 가까운 곳에 성당이 어디 있는지를 가장 먼저 알아봐야 한다. 나 역시 그랬다. 대학교에 가기 전 집 근처 무려 2분 거리에 성당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아버지는 그 점을 가장 다행으로 여겼다. 아마 나도 일정 부분 ‘주말에 왔다 갔다 편하긴 하겠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3. 성당을 갔다. 이상했다. 내가 아는 신부님이 아니었고, 내 친구가 연주하는 오르간이 아니었다. 익숙한 성가도 아니었다. 낯설었다. 그때 처음으로 들었던 생각은 난 매주 성당을 가며 안부를 물을 수 있는, 편하게 인사를 할 수 있는, 미사가 끝나면 치킨도 함께 뜯을 수 있는 그런 친구들이 보고 싶었던 거지, ‘주님’을 바라본 적이 있었나? 20년을 다녀온 성당에 처음으로 의문을 가져본 순간이었고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나에게 성당은 고향 같은 것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4. 그때부터 무게 삐딱선을 타게 된다. 타지에 나와 산다는 장점을 이용해 주말이면 놀기 바빴지 성당은 근처도 가지 않았다. 근처에 살기는 했지만. 그래도 겁은 있어서 집에는 성당 갔다고, 성사 봤다고 행복한 가정을 위한다는 합리화 하에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렇게 찾은 자유(?)는 스무 살이라는 나이와 맞물려 정말 빠른 속도로 20년을 쌓아 올린 신앙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리고 8년이 흘렀고, 난 여전히 냉담자다. 이렇게 무너질 신앙이었으면 애초에 쌓은 게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저 웃었다


5. 시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마음이 지칠 때면 으레 성당 생각이 나기도 했고 실제로 찾아가 보기도 했다. 나와 쓰다를 함께하는 바람꽃 역시 성당을 다니는 독실한 교인으로써 나에게 조심스레 함께 다녀보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한 번씩 나가기도 했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더라. 대체 신이라는 게 무엇인지. 매주 주말이면 성당에 앉아 똑같은 기도문을 외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깨달을 수 없었다. 그렇게 교회와 멀어진 간격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6. 두 아들과 손을 잡고 별 탈 없이 주말에 성당을 갈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던 아버지에게 미안했다. 여전히 부활절이나 성탄절이 다가올 때면 판공성사를 보았느냐는 엄마의 물음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것도 지쳤다. 늘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떠날 수 없다면 일정 정도 조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설날과 추석(성당은 명절에 미사를 함께 바친다.) 그리고 혹시나 부모님과 함께 해야 하는 순간을 포함하여 일 년에 5번 정도는 정말 밝은 표정으로 적극적으로 성당을 가보자는 어떤 합의. 이것은 신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 원활하고 행복한 나의 가정을 위한 것이었다. 


7. 잘 모르겠다. 종교라는 것에 대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면 엄마는 그건 이해할 일이 아니라며 건방진 놈이라고 하신다.) 오히려 납득이 가지 않는 행위를 어떤 이득을 취하기 위해, 이해관계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교회를 드나드는 것부터가 비겁한 일 아닐까? 내가 필요할 때만 신을 찾을까 봐,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신을 욕할까 봐, 그래서 더더욱 가기 싫었다. 기대기 싫어서, 신은 얼마나 서운하겠는가 나 같은 놈이 전 세계에 적어도 수천은 될 텐데.


8. 성당을 가지 않겠다. 선언 한 순간 집에서 돌아온 대답은 교만하다는 비판이었다. 군대에서 나는 성당보다는 원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거기서 주는 간식이 맛있었기 때문이다.(2010년의 군종 성당은 여전히 초코파이였다. 저런.) 맛있게 먹으며 원불교의 교리를 라디오 듣듯이 들었는데 썩 나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상에 좋은 말은 다 붙여 놓은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는데 좋은 말 마다할리 없으니까. 불교의 교리를 조금 일상적으로 변형한 모델이 원불교라 그런지 듣기 편했다. 그 일화를 집에 가서 부모님께 농담하듯이 말했고 바로 후회했다. 내색은 안 하셨지만 그래도 아들의 파격적 행보에 조금 불편하셨나 보다. 사실 그마저도 즐긴 건 사실이었다.


9. 어떻게 보면 점점 한국 사회에서의 젊은 세대들은 예전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본인의 삶을 결정하고 있으나 여전히 종교적 문제는 보수적으로 작용한다. 부모가 다니는 종교를 자식도 거부감 없이 다녀야 하며, 종교로 인한 불화로 누군가는 결혼도 틀어지는 현실에 신물이 난 모양이다. 천주교의 신자는 늘어났다고 하나 청년층 신자가 점차 줄어든 데에는 그러한 이유도 있을 것이라 본다. 이는 비단 천주교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10. 앞으로도 이러한 노선을 유지할 것 같다. 이제는 성당 다닌다는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나도 다닌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성당을 다니지 않으니 교회를 다니자는 친구의 말도 정중히 거절할 것이다. 내가 혹여나 큰 병에 걸리더라도 신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신을 믿진 않지만, 신의 가르침은 잘 익히며 살아갈 것이다.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를 용서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아마 처음 쓰는 것 같다. 아-후련해.


11. 배설을 늘어놓은 듯한 글들에 또 한 번 부끄러워졌다. 조금 더 입체적으로 썼으면 좋았을 것을 다 쓰고 나서야 보이는 이 부족함은 채워질 겨를이 없으니 아직 멀었음을 실감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2017. 04. 12. 매거진쓰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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