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2030년 5월의 어느 하루

Written by 승훈


알람이 울렸다. 오늘은 2030년 5월 15일 스승의 날. 10년 전 기자가 되고 싶었던 난 정확히 10년 뒤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내 직업은 기록 활동가, 세간에 주목받지 못하는 것들의 이야기에 귀를 열고 기록하며 산다. 글 대신 영상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영상의 시대가 되더라도, 어떤 삶은 주목받지 못했다. 난 그런 걸  적어 내려간다. 읽는 이가 줄어드는 시대에, 글로 뭔가를 남기는 일을 하는 것이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오늘 나는 기후 위기 관련 단체의 어떤 세미나에 참석하기로 했다. 일의 연장이었다. 달력을 봄과 동시에 날씨를 파악하는 건 이제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 됐다. 오늘 미세먼지 농도는 예년 수준보다 조금 높다. 10년 전 나는 미세먼지에 극도로 민감했으나, 이젠 그것이 늘 벌어지는 것이 돼버리는 바람에 미세먼지에도 무뎌졌다. 그토록 답답해하던 마스크에도 익숙해지고 말았다. 이날 한낮 기온은 31도라고 했다. 물론 체감 온도는 그보다 더 더울 것으로 예상됐다.

실내 적정온도가 정해져 있으므로, 더운 날엔 각자가 짧고 얇은 옷을 입어야 했다. 가진 옷 중 가장 경량 소재로 된 것들을 꺼냈다. 축축해진 마스크를 걸친 채 현장에 도착했다. 자리를 잡은 나는 노트북을 열고 녹음기를 켠 다음 세미나 내용을 기록할 준비를 마쳤다. 기후 관련 지식이 없는 내가 대충 어림잡은 이야기의 큰 흐름은 다음과 같았다. “언제까지 개인의 실천을 운운할 것이냐, 좀 더 거대한 변화가 필요하다”라는 입장과 그걸 뒤집은 “언제까지 거대한 변화만 운운할 것이냐, 개인의 실천이 중시돼야 한다”라는 내용이 충돌했다. 전자는 일부 해안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터전이 잠기기 시작했다며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화면에 띄워놓고 의견을 개진했다. 반대쪽에서는 그런 사람들은 이미 일전에도 존재했다고, 꼭 바닷물에 집이 잠기는 사람만이 기후 위기 취약계층이 아니라며 소위 쪽방촌이라 불리는  곳에 사는 주거 취약계층의 비참을 전시했다.

언제부턴가 기후 위기를 설파하는 사람들은, 데이터와 수치 대신 이렇게 사람들의 감정을 흔들리게 할 만한 것들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두 사람을 두리번거리며 그 이야기들을 적기 시작했다. 합의의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주장을 공고히 하고자, 그들은 그들이 이야기하는 ‘취약계층’을 근거 재료 삼고 있을 따름이었다. 전자는 후자를 ‘사소한 일’에 매여 사는 사람으로 치부했고, 후자는 전자를 시스템 주의자라고 힐난했다. 서로가 서로의 말에 어떤 딱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어본다. 이런 이야기는 분명 10년 전 내가 속했던 한 기후 위기 단체의 단톡방에서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때도 어떤 이들은 보다 근본적인 것들이 개선돼야 한다며 캠페인 같은 것들을 소꿉놀이 취급했다. 그것들을 선민주의라고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그들만의 단체를 만들고 더더욱 캠페인을 중시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 자체가 위선이라며 기후라는 단어에 치를 떨기 시작했다. 세상은 재난 영화처럼 극적인 위기를 맞지 않았다. 그 사이 해수면은 차츰차츰 상승했다. 기온도 서서히 올랐다. 그리고 세상은 점점 갈라 쳐졌다. 어느 순간 일상이 돼버린 극심한 일교차처럼, 기후 위기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극과 극으로 분절돼 버리고 말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2030년 5월의 어느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