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결심한 날,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스위스였다. 여러 번 가도 여러 번 더 가고 싶어지는 나라는 딱 한 나라다. 스위스.
주변 사람들이 가고 싶은 여행지로 프랑스나 이탈리아, 북유럽을 이야기할 때 나는 늘 스위스를 꼽는다. 가족을 포함해 여행하기 좋은 나라들도 많은데 왜 하필 스위스냐는 질문에 딱히 명확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남편조차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 남편이 10년 전 나에게 첫 스위스 여행을 선물해 주었으면서. 굳이 스위스에 꽂힌 원인을 꼽아 보자면 남편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남편은 그 당시만 해도 20대 때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면서 유럽 중에서도 스위스가 가장 좋다고 말한 장본인이다. 당연히 한 곳만 가라면 스위스라고 하면서 여행지를 딱 정했다. 10년 전, 첫째가 돌을 조금 넘겼을 때였다. 아이를 엄마에게 맡기고 둘이서만 아주 짧게 다녀온 여행.
“소개해준 건 후회 안 하는데 당신이 이렇게까지 스위스만 갈 줄은 몰랐지."
이것도 맞는 말이다. 한 번의 강렬한 경험을 시작으로 한 나라만 줄곧 갈 줄 누가 알았겠냐고.
일을 관두고 당분간 비생산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가면서 여행은 꼭 다녀와야겠다 싶었다. 퇴사 날짜도 확정되지 않았는데 항공권을 먼저 끊었다. 혼자서라도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현실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퇴사하는 날까지 버티기 위한 장치에 가까웠다.
지난 2년을 20년처럼 살았다. 힘들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스위스'. 마치 삶의 마지막 목적을 스위스 땅 한 번 밟아보는 것에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붓는 사람처럼.
또 스위스냐는 질문에 나의 대답을 하자면, 맞다. 또였다. '또'라는 말이 맞다.
다섯 번째 스위스니까.
스위스가 좋다. 사실 그게 전부다. 좋은데 뭐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가.
스위스는 유럽에서 제일 비싼 나라다. 매번 탕진하는 기분이 들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다. 오히려 다음 여행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게 된다. 다행히 쇼핑에는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렇게 모은 돈을 여행비로 다 쓴다.
유명한 건축물이나 박물관 관람보다 여행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건 자연 그 자체다. 산을 오르고, 호수를 바라보고, 한적한 마을을 걷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머무르는 순간들을 간직한다. 자연을 좋아하는 나에게 여행은 그렇게 정립되었다.
자연을 좋아하니, 자연을 대표하는 나라 스위스를 좋아하는 건 필연이겠다. 알프스와 호수, 서두름은 태어나서부터 배워본 적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 자연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풍경. 그 여유로움과 깨끗함이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래서 스위스는 점점 ‘여행지’가 아니라 내 마음의 고향으로 언제라도 ‘돌아가는 곳’이 되었다.
다섯 번째라고 해서 스위스를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다. 매번 갈 때마다 새로웠고, 여전히 버벅거렸다. 영어권이 아니라는 점도 늘 긴장을 불렀다. 독일어를 조금이라도 배우고 가볼까 생각했지만, 일에 치여 살며 여행 계획을 짜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결국 마음속으로 결론을 냈다. 영어나 잘 활용하자.
서툴러도, 완벽히 알지 못해도 괜찮았다. 익숙한 듯 낯선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스위스 여행 모두 설렜고 앞으로 또 가게 되더라도 계속 설렐 것은 분명하다.
처음에는 이번 여행에 의미를 담으려 했다. 퇴사 후 떠나는 여행이니 ‘나의 존재를 찾아가는 여정’이어야 할 것 같았다. 의미를 만들어내야 할 것 같은 강박도 있었다.
그런데 문득 생각했다. 무슨 의미가 필요할까. 여행을 하고 싶고, 스위스가 좋은데. 그냥 간절하게도 가고 싶을 뿐인데.
왜 또 스위스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가고 싶다고. 조금은 감성적이면서 오글거리게 표현하자면, 사랑에 빠졌다고.
다섯 번째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의미? 없다. 그냥 보고 싶다. 스위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