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시간이 생긴다면 뭘 하고 싶은지 상상만 해도 즐겁다. 하물며 여행을 혼자 간다니. 모든 계획이 오롯이 나에게 달려 있었다. 부담이 아니라 자유로 느껴졌다. 처음 느껴보는 해방감이었다.
여행 계획을 펼쳐놓고 앉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 그 유명한 산 꼭대기인 융프라우, 마터호른을 굳이 안 가도 된다는 것. 다섯 번째니까 가능한 사치였다.
매년 사던 스위스 여행책을 이번에도 어김없이 구매했다. 늘 주요 관광지 위주로만 정보를 찾았는데 이번엔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던 페이지를 유심히 읽기도 했다. 구글 지도에서 이름도 낯선 마을을 검색했다. 현지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마을의 모습은 어떨까 상상하며. 2주란 시간이면 그동안 가봤던 곳도, 이번에 새로 찾은 마을도 다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플랜 B도 플랜 C도 만들지 않았다. 이전 여행들에서는 함께 가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않으려면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야 했다. 이번엔 달랐다. 월요일은 루체른. 화요일은 인터라켄. 끝이었다. 전날 밤에 다음 날 일정을 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교통 앱과 구글 지도만 있으면 됐다.
딱 하나 아쉬운 게 있긴 했다. 나는 물놀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 스위스 하면 호수 수영인데. 수영복 입고 물에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건 있었다. 그럼에도 나처럼 보는 수영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사람이라면 여름 스위스는 꼭 가봐야 한다. 여름 호수가 그 자체로 장관이니까.
식사 계획을 세우면서는 피식 웃음이 났다. 스위스는 채식 옵션이 많은 편이라 먹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럼에도 비건을 지향하는 나에게 식당 선택은 늘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특히 그랬다. 비건 메뉴가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 식당 선택지가 좁아졌다. 함께 가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이번엔 달랐다.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으면 끝이었다. 채식 식당만 골라서 다녀도 괜찮았다. 아무 눈치도 안 봐도 됐다.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가방을 싸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텀블러, 손수건, 장바구니, 접이식 다회용기. 하나씩 챙겨 넣으면서 상상했다. 카페에서 영어로 "텀블러에 담아주세요" 말하는 장면, 일회용 빨대를 정중하게 거절하는 장면. 평소에도 하는 일이지만 여행지에서는 좀 달랐다. 긴장감이 더 생겼고, 타지에서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해 냈을 때 느끼는 뿌듯함도 남달랐다.
가장 오래 고민한 건 스위스 트래블 패스였다.
교통권을 사는 사이트에 들어가 1등석과 2등석 가격을 번갈아 보았다. 약 30~40만 원 차이. 지금까지는 늘 2등석만 탔다. 2등석도 사실 큰 불편함은 없었지만 이번엔 망설여졌다. 혼자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버거울 것 같았다. 붐비는 시간에 자리를 찾아 헤맬 수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커피 십 수 잔 값 아낀다고 생각하고 1등석 패스를 샀다.
여행 준비물은 새 제품을 사는 건 지양하는 편이라 대부분 당근마켓에서 구했다. 문제는 캐리어였다. 원래 쓰던 건 바퀴가 삐걱거려서 2주 동안 끌고 다니기엔 무리였다. 인터넷에서 리퍼브 제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며칠을 찾다가 노란색 캐리어를 발견했다. 제일 좋아하는 색. 온 우주가 이번 여행을 응원하는 것 같았다.
나머지는 술술 풀렸다. 유심은 e 심으로 간편하게, 공항에서 유심칩 갈아 끼울 필요 없이 폰에서 설정만 하면 됐다. 숙소는 싱글룸으로 예약하니 극성수기 치고 저렴했다. 혼자 쓰는 방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준비하는 동안 꿈에도 스위스가 나왔다. 알프스 산맥을 나비들과 같이 걷는 꿈. 기차 창밖으로 호수를 보는 꿈. 진짜였다. 얼마나 가고 싶었던 건지.
출국 전날 밤, 늦게까지 짐을 쌌다. 텀블러, 장바구니, 다회용기, 여름옷들, 러닝 용품, 충전기... 필요할지 안 할지 모를 것도 일단 챙겼다. 여권과 1등석 패스 사본은 소지품 가방에 따로 넣었다.
진짜 준비 끝.
이제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