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
오른쪽 뺨에 자리 잡은 8cm가량의 지렁이 모양의 흉터.
흉터와는 상반되게 너무나 흐려져 기억의 조각조차 찾을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한 것이라고 한다.
나와는 달리 늘 내 얼굴의 흉터가 대화의 소재거리가 되면 마치 어제 있던 일처럼 생생하게 그날을 묘사하시는 부모님의 말씀에 따르면 말괄량이 기질이 다분했던 3살가량의 내가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고는 늘 내 편이 되어주는 아버지를 서러운 울음으로 토해내며 문지방을 넘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일이 그렇게 되려고 했는지 평소에는 안전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아버지가 다림질을 하겠다고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를 뿜어대는 다리미를 세운 채 잠시 자리를 옮겼을 찰나였고 그의 어린 딸이 그곳을 정확히 조준하여 넘어졌다고 한다.
자지러지는 아이의 발작적인 울음이 있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혼비백산한 부모가 뛰어왔을 것이다. 그때부터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볼 중앙에 나서 차마 가리기도 힘든 다리미 화상 흉터는 내 마스코트 마냥 내 얼굴에 함께한다.
내 외모를 스스로 인지하기 전부터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일까. 외모에 관심이 늘어날 사춘기 때도, 17:1로 싸워서 생긴 흉터라는 친구들의 놀림에도, 마치 눈물자국 같다고 혹시 울었냐고 물어보는 길에서 지나치는 어른들의 물음에도 나는 늘 무던했다. 때로는 왼쪽 뺨인지 오른쪽 뺨인지도 헷갈릴 정도였으니 그저 흐린 눈을 한 게 아니라 정말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이런 나와는 달리 부모님은 인근에 유명하다는 병원들을 찾아다니면 흉터를 없애주려 최선을 다했음에도 화상 흉터는 아직도 완벽하게 지울 수 있는 기술이 없다는 말을 의사들로부터 들을 때마다 안타까움에 혀를 차며 내 흉터를 새삼스레 만지며 한참을 할 말을 잃곤 했다. 마치 당신들에게는 흉터가 사려 깊지 못해서 딸내미 얼굴에 흉을 남긴 무성의한 부모라는 낙인이 된듯싶다.
이러한 이유로 그 옛날 노비들에게 죄수들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낙인을 달궈진 쇠로 새겼나 싶다. 영원히 도망갈 수 없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누군가의 소유물로 살도록, 혹은 자신의 과오를 숨길 수 없게 지글지글 붉게 달아오른 쇠 도장을 피부 깊숙이 찍어 누른다. 신체의 일부에 작은 비율에 지나지 않은 흉터겠지만 그것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시지프스가 무한히 굴려 올려야 했던 돌덩이만큼이나 무거운 존재였을 것이다.
꼭 물리적으로 시각적으로 낙인을 찍지 않더라도 우리는 낙인찍힌 채 역사 속에 부정적인 오해로 고통받는 사례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굶주림에 울부짖는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은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라는 말은 남겼다고 익히 들어왔었다.
백성들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배부른 부유층의 기름진 발언은 성난 민심에 불을 거세게 만들었을 것이고 이것을 후대에 전해 들었던 나와 같은 세대도 마리 앙투아네트 하면 희대의 악녀의 이미지로 굳게 만들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가엾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프랑스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그녀는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수수한 차림을 하고 그 당시만 해도 악마의 열매라고 알려져 사람들이 기피하던 구황작물인 감자를 몸소 먹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사치스러운 액세서리 대신 감자꽃으로 몸을 단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감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깨기 위해 앞장섰다고 한다. 얼마나 오랜 시간 적어도 나처럼 무심하고 무식한 사람을 그녀를 악녀로 낙인찍고 오해하고 살았는지 새삼 미안하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사회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인 더 큰 문제다.
사람이나 집단에 부과된 부정적인 편견이 그들의 행동, 기회, 자아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효과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효과를 낙인 효과라 명명한다. 이러한 낙인은 과거의 행동, 사회적 신분, 질병, 장애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이유로 찍힌 뜨거운 고통도 흔적도 보이지 않는 낙인이 개인의 자신감을 저하시키고, 사회적 기회를 박탈하며, 자아 인식을 부정적으로 변화시켜 결국 불행을 초래하는 무서운 낙인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억울하게 긴 옥살이를 하게 된 장발장은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혀 출소 후에 자신에게 꽂히는 혐오 어린 시선들에 상처받고 분노하여 결국 자신에게 손 내밀어 준 미리엘 신부를 배신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내린 부정적인 평가가 결국 자아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고 정말로 남들이 찍은 낙인대로 행동하게 된 것이다.
비단 소설 속의 예시뿐 아이라 실제로도 전과자라는 낙인이 있는 이는 우리 사회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이 훨씬 어렵게 된다. 전과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시선들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공정한 기회를 제공받지 못해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기 힘들어지고 또다시 범죄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에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알 수 없는 것이건만 사회가 찍은 낙인이라는 결말은 실제로 그들의 현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일까.
그럼 보통의 선량한 사람들은 저지르지 않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반론할 수 있겠다.
우리 사회의 낙인은 과오를 저지른 전과자들에게만 찍히지 않는다. 정신 질환을 가진 이들, 에이즈로 더 잘 알려진 후천성 면역결핍증을 가진 이들을 대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태도를 돌이켜 보기만 하더라도 섣부르게 찍힌 낙인 얼마나 새겨진 이들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쇠는 불의 화기를 그대로 받아내어 자신 속에 삼키고 곧 열기 그 자체가 된다. 우리가 타인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 또한 달구어진 쇠만큼 뜨겁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면 함부로 그 마음의 낙인을 남들에게 들이대기 두렵지 않을까.
낙인의 부정적인 영향을 스스로 인지하고 또는 교육하여 편견을 줄여나간다면 우리 곁에는 공정한 기회를 제공받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행복한 이웃들이 늘어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