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만 하다 아무도 결정 안 하는 회사에서 메일쓰기

by 퇴근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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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우리 회사에는 빌런 조부장이 있다.
팀원들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지치게 만드는, 바로 그 조씨 말이다

.

이런 사람은 신기하게도 어디에나 꼭 있다지.
‘또라이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긴 걸까.


조씨,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너… 어디, Josh고?


"실화를 기반으로 작성하였으나, 일부 각색함"



회사에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인가?”


이 질문은 연차가 쌓일수록 더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신입 때는 뭐라도 열심히 하면 잘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입이 쉽게 안 떨어진다. 솔직히 말하면, 모든 걸 다 잘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근데 딱 하나, 정말 딱 한 가지는 회사에 꽤 괜찮은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메일이다.


나는 지금 회사에 들어온 지 1년 반 정도 됐다. 이 회사는 최근 몇 년 사이 급성장을 했다. 경력직이 우르르 들어오고, 기존 인원은 높은 업무 강도에 우르르 나갔다. 그 결과, 회사는 커졌는데 소통 방식이랑 R&R은 거의 폐허 상태였다.


지금은 인원이 2~3천 명쯤 되는데, 그 숫자만큼 메일도 날아다닌다.

문제는 그 메일들이 거의 이런 식이었다는 거다.


받는 사람: 최대리(생산팀), 이신입(구매팀)
참조: 나, 마케팅팀 공용메일


안녕하십니까. 박과장입니다.
차년도 재고 정책 관련하여 첨부와 같이 단순 공유드립니다.
추후 이슈 발생 소지가 있어 사전 송부드립니다.
중요한 제품수 조정 건은 메신저로 말씀드린 내용으로 갈음하겠습니다.



이런 메일이 열 개 중 여덟, 아홉 개였다.
회사 허리를 담당한다는 과장급이 저렇게 메일을 쓰면, 그 회사의 실무적 미래는 솔직히 밝지 않다.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짧은 메일 하나에 문제는 다섯 개나 들어 있다!


첫째, 수신이랑 참조를 구분 안 한다.
재고 실무 담당자는 나인데, 나는 참조에 있고 엉뚱한 사람만 수신이다. 기존메일에 그냥 전체 회신한거다.

둘째, 누구한테 뭘 해달라는지가 없다.
“각 부서에서는 참고 바랍니다”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나중에 문제 생기면 난 책임 없음”이라는 뜻이다.
실제 현업에서는 이 메일을 수십 명이 받는다. 한 사람당 1분만 낭비해도 회사는 하루에 몇 시간을 그냥 버리는 셈이다.

셋째, ‘단순 공유’라는 만능 면피용 문장.
구체적인 요청도, 방향도 없다. 그냥 리스크를 안고 싶지 않다는 의지만 또렷하다.

넷째, 진짜 중요한 얘기는 메신저나 전화로 한다.
기록은 안 남기고, 말로만 휘발시킨다.

다섯째, 팀장 이상은 교묘하게 빼놓는다.
축소 보고, 아니면 아예 미보고. 실무에서만 끙끙 앓게 만드는 구조다.


이 회사는 꽤 보수적이다. 실무 효율보다 “잡음 안 나게 하기”가 더 중요하다. 성장이나 고객 만족보다, 리스크가 나한테 안 튀는 게 최우선인 분위기였다.

그러다보니 팀장은 문제를 모르고, 실무자끼리만 머리를 꽁꽁싸매고 문제를 덮는식이었다. 어쩌다 실수가 한번 번져나가면 그 책임은 보고를 하지 않은 실무자가 지는 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입사 초기부터 메일 작성 5원칙을 정했다.

그리고 메일 쓸 때만큼은 원칙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은 내가 박과장에 빙의해서 쓴 메일이다. (메일 작성 5원칙을 준수함)


받는 사람: 나, 정팀장(나의 상사)

참조: 영업본부장, 관련자 전원


정팀장님, @@님(나) 안녕하세요. -- 수신인이 명확, 팀장을 통한 의사결정 요청

영업1팀 박과장입니다.


차년도 재고 정책 최종안에 대한 수정검토를 요청드립니다. -- 원하는 바가 명확
기존 미팅에서 제안주신 주력제품 10% 감산은 매출 기준 5% 감소로 이어짐을 실무자(나)와 확인했습니다.

-- 별도로 소통한 내용을 공식적으로 오픈
주력제품 5% 감산 시에는 매출 감소 없이 영업이익이 유지되는 것으로 확인되어, -- 요청사항의 근거 명확
10%가 아닌 5% 감산으로 최종 합의를 요청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 p.5 참고 부탁드립니다)
12월 30일까지 메일 회신 부탁드립니다.” -- 회신 기한까지 금상첨화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명확하고

뭘 원하는지도 분명하고

근거도 있고

결정권자도 포함돼 있다.


처음에는 전화로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얘기를 굳이 왜 메일로 쓰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솔직히 스트레스도 꽤 받았다.


근데 나는 실무자일수록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스크를 미리 오픈해야 나중에 터질 큰 화를 막을 수 있고, 실무자가 문제를 덤터기 쓰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1년 반쯤 지나니까 이 방식이 HQ에 슬금슬금 자리 잡기 시작했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메일 톤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러면서 각 팀장들이 진행되고있는 프로젝트의 현안과 Risk를 이해하고,

실무자들에게 필요한 자원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각 팀에 필요한바를 명확하게 요청하면서 R&R이 전보다 명확해졌고

때론 각자의 잘못은 인정하면서 서로가 각자의 위치에서 신속하게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HQ와 떨어져있는 현지 법인은 “아몰랑 단순 공유” 화법을 쓰긴 하지만, 언젠간 나아지겠지 뭐.


그래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일까?

그 질문에 아직도 선뜻 “예스”라고 말하긴 어렵다.


다만, 전사에 아주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줬다는 점은 혼자서 은근히 뿌듯해한다.

이건 매출로도, KPI로도 잘 안 잡힌다.
그래서 내가 내 성과라고 주장하기도 애매하고, 누가 알아주기도 쉽지 않다.


근데 만족의 내 영향력에 둔다면, 이건 꽤 성공적인 시도 아니었을까 싶다.

딱딱한 회사에서 숫자만 붙잡고 살지 말고, 일하는 분위기 하나 바꿔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게 의외로,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이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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